[위클리 리포트] 이웃 울타리 안에서 돌봄받는 ‘치매안심마을’
《온 이웃이 도우미… ‘치매안심마을’ 가보니
치매를 앓아도 병원이 아니라 내가 사는 집, 마을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식당 사장님부터 동네 의사 약사, 집배원까지 모든 이웃들이 함께 환자를 돌봐주는, 그런 마을이 있다. 》
16일 오전 치매 환자 윤만석 씨(왼쪽)가 서울 강서구의 한 ‘치매안심지킴이’ 약국에서 약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서구에는 이처럼 치매 환자의 실종이나 배회를 막는 치매안심지킴이 약국과 상점이 367곳이나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환자 배회-실종 막는 ‘우리 동네 안심지킴이’
그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지금, 윤 씨는 요양시설에 입원하거나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치매에 걸린 80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걸음이 기운찼다. 아내를 간병하느라 47kg까지 줄었던 몸무게도 52kg으로 회복됐다고 한다. 윤 씨는 “매일 ‘출근 도장’ 찍듯이 치매안심센터로 산책하러 나오는 게 비결”이라며 웃었다.
특히 약국에선 치매 환자가 약을 건너뛰거나 한꺼번에 많이 먹지 않도록 요일이 적힌 통에 약을 잘게 나눠 주는 식으로 복약 지도에 더 신경을 쓴다. 송인석 약사는 “약을 받아 간 지 얼마 안 된 환자가 또 약국에 찾아오면 미리 적어둔 보호자 연락처로 전화해서 ‘어르신이 오늘 좀 이상하다’고 알린다”고 말했다.
동네 음식점들은 무료 치매 검사 안내문을 가게에 비치했다가 손님에게 나눠 준다. 등촌동에서 한식집을 운영하는 권민아 씨(56)는 “몇 해 전 아버지가 치매로 진단됐을 때 치매안심센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라며 “손님이 음식을 주문해 놓고 깜빡하거나 할 때면 안내문을 쥐여주며 ‘꼭 검사해 보시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가 비슷하게 생긴 건물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아스팔트에 커다랗게 현재 위치를 적어두기도 하고, 주민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두뇌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정류장 벽마다 간단한 퀴즈도 붙여 놨다. 강서우체국 집배원 130여 명도 지난해 9월부터 배회하는 치매 노인을 발견하면 경찰이나 치매안심센터에 신고하는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강서구 치매안심센터는 보건복지부 주관 ‘치매관리사업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근 3년 연속 최우수상을 받았다. 강선옥 강서구 치매안심센터 총괄팀장은 “직원들이 발로 뛰어다니며 여러 기관을 설득한 결과”라고 말했다.
● 사진관-영화관서 일하는 환자들… 주민들과 교류
치매안심센터에 등록된 환자들은 인지 기능을 높이는 스트레칭을 배우거나(위 사진) 작업치료사의 방문 상담(아래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대표적인 게 인천광역치매센터의 ‘가치함께 사진관’이다. 지역 주민에게 무료로 가족사진을 찍어서 액자를 만들어 주는 이 사진관에선 특이하게도 손님 응대부터 촬영, 인화를 모두 초로기 치매 환자 10여 명이 담당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역은 사진사 출신 치매 환자 한창규 씨(65). 한 씨는 2018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혈관성 치매로 진단돼 평생 꾸려 온 사진관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 치매 상담 중 “카메라를 다시 잡는 게 소원”이라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은 센터 직원들이 ‘아예 치매 환자들이 운영하는 사진관을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7월까지 총 188명의 지역 주민이 이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받아 갔다. 한 씨는 “사진 속 이웃들의 즐거운 표정이 눈앞에 생생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경기 시흥시 치매안심센터는 공공일자리 사업을 통해 초로기 치매 환자 3명을 고용해 영화관을 운영한다. 치매 관련 영화만 틀어주는 ‘알츠시네마’다.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이지만 ‘치매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다. 여기서 일하는 치매 환자 A 씨는 “치매로 진단된 후 처음으로 내 손으로 돈을 버니 가족 앞에서 위신이 선다”고 말했다.
치매 환자가 지역 주민과 융화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드는 곳도 있다. 대구 남구 치매안심센터는 지난해 9월 인근 대학 모델과와 협력해 ‘한복 패션쇼’를 열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치매 환자의 우울감도 개선해주고, 치매에 대한 참가 학생들의 인식도 올려줘 일석이조라고 한다.
● 살던 곳에서 돌봄받아야 비용도 절감
정부와 지자체가 치매안심마을 조성에 힘쓰는 이유 중 하나는 ‘비용 대비 효율’이 가장 높은 길이기 때문이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추정 치매 환자는 2021년 88만 명에서 2050년 314만 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된다. 같은 기간 치매 환자 관리에 드는 연간 의료비와 간병비 등 관리 비용도 18조7000억 원에서 121조7000억 원으로 치솟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처럼 치매 환자를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사실상 ‘격리’시키는 방식을 지속하면 국민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 재정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전국 256개 시군구에 구축된 각 치매안심센터는 해당 지역의 특성에 어울리는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려 노력하고 있다. 경북광역치매센터는 면적이 넓고 대중교통이 불편한 경북 지역 특성을 감안해 치매로 진단된 이후에도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칩거 환자’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공립 요양병원이 많은 강원 지역 치매안심센터들은 뇌중풍(뇌졸중) 등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환자들에게 지역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안내하고 있다.
증상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치매 환자가 중증으로 악화하지 않도록 막는 것도 주요 임무다. 치매 중증도를 4단계(최경도, 경도, 중등도, 중증)로 나눴을 때 최경도 환자의 한 해 관리 비용은 1542만 원이지만, 중증의 경우 3312만 원으로 2배가 넘는다. 환자가 중증으로 악화할 때까지 방치하면 당사자에게도 큰 불행이지만, 국가 의료비 측면에서도 부담이 커진다는 얘기다.
서울 강서구 치매안심센터는 초기 치매 환자 가운데 가족의 보살핌을 받기 어려운 이들을 선별해 작업치료사 등이 주 1회 방문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 초부터 방문 서비스를 받고 있는 김옥단 씨(87)는 “매주 (작업치료사) 선생님이 오는 날만 기다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정된 예산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다 보니, 센터 측이 대상을 최대한 늘렸는데도 올해 방문 대상은 36명이 한계였다. 김 씨의 딸 신미애 씨(56)가 작업치료사를 배웅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저희 내년에도 계속 방문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면 정말 좋겠는데….”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