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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 달빛 아래 순백의 상사화가 피어난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3-08-19 01:40:00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는 8월말 세계적 희귀종인 흰색 상사화가 피어난다. 올해 위도 상사화가 만개하는 8월24∼31일 기간 중에는 ‘고슴도치섬 위도 상사화 축제’도 열린다.


상사화(相思花).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꽃이다. 상사병을 앓게 하는 이 지독한 사랑은 짝사랑이다.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서로를 결코 만날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아픔이고 슬픔이 된다. 전북 부안군 격포항에서 배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위도에는 8월 말 순백의 ‘위도 상사화’가 피어난다. 지구상에서 단 한 곳, 위도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종 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여름의 끝자락에 위도를 찾아 떠난다.

● 밤에 더 희게 빛나는 위도 상사화
보통 한 송이 꽃이 피려면 봄에 먼저 새싹잎이 나고, 줄기가 자라나고, 가지에서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망울이 터져 드디어 꽃이 피어나게 된다.

그런데 상사화는 다르다. 추운 겨울(2월)에 푸릇푸릇 새싹이 피어난다. 봄에 잎이 무성해진다. 여름이 올 즈음인 6월, 잎은 말라 다 떨어진다. 그러다 8월 중하순, 잎이 떨어진 뿌리에서 한 가닥 줄기가 불쑥 올라와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마치 길거리에서 파는 한 송이 장미가 잎과 가시를 다 제거해 매끈한 줄기 끝에 달린 것처럼 상사화는 땅 위에서 솟아오른 깨끗한 줄기 끝에 꽃 한 송이가 달려 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한 것처럼, 한 송이 상사화를 피우기 위해 잎은 추운 겨울부터 새싹을 틔우고 부지런히 광합성을 했다. 그러다 말라붙은 잎은 땅으로 떨어졌고, 뿌리로 들어가 꽃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고, 희생하고, 사랑했는데 잎과 꽃은 살아생전에는 볼 수 없는 운명이다. 죽어서야 만날 수 있는 인연. 그래서 상사화를 이별초, 부활초라고도 부른다.

상사화는 여러 가지 색깔을 띠고 있다. 노랑 상사화, 분홍 상사화, 붉은색 상사화, 흰색 상사화….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붉은색 상사화인 ‘꽃무릇’(석산)이다. 상사화는 보통 8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피는데, 꽃무릇은 약간 늦어 9∼10월에 만개해 ‘가을의 전령’이라고 불린다. 이 시기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에 가면 사찰 입구 솔밭 아래에 붉은 융단이 깔린 것처럼 초록색 줄기 위에 피어난 붉은색 상사화가 장관을 이룬다. 선운사 계곡을 따라 길가에 한두 송이 피어난 꽃무릇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8월 말 부안의 위도에서는 흰색 상사화가 만개한다. 백합처럼 순백색으로 피어나는 ‘위도 상사화’. 전 지구상에 오직 위도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희귀종이다. 붉은색 꽃무릇은 너무나도 한꺼번에 많이 심어 놓아 처절한 사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순백의 위도 상사화는 사랑과 슬픔이 과하지 않고, 우아함을 잃지 않아 오히려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기자가 위도를 찾았던 8월 초에는 위도 상사화가 진리 해변가 마을의 가정집 소나무 아래에 탐스럽게 몇 송이 피어 있었다. 올해 위도 상사화는 8월 24∼31일경 만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26일 위도해수욕장에서는 ‘고슴도치섬 위도 상사화 축제’가 열린다. 수평선을 물들이는 붉은 노을이 진 후 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달빛 속에 은은하게 자태를 드러낸 위도 상사화는 밤에 더욱 희게 빛난다.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위도 해안도로(16.8km)에서 상사화를 만끽하며 위도를 일주하는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과 사진작가들이 앞다퉈 섬을 찾는다.

● 호랑이의 눈? 바닷가에 뜬 달!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위도의 대월습곡은 퇴적암 지층이 압력을 받아 둥그렇게 말려 들어간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바닷가에 뜬 둥근달이라는 뜻에서 ‘대월’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부안 격포항에서 1시간쯤 배를 타고 가면 닿을 수 있는 위도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부안의 지질명소 19곳 중 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위도 대월습곡은 이달 11일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 지정을 예고했다.

대월습곡에 가려면 위도해수욕장에서 물이 빠진 갯벌을 걸어야 한다. 약간의 첨벙거림 끝에 모래사장을 건너니 숲길이 나온다. 숲길의 나무 밑에는 작은 구멍들이 수백, 수천 개 뚫려 있는데 커다란 집게를 가진 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면서 와사삭 소리를 낸다. 게의 불그스름한 등껍데기에는 웃는 사람의 입술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미소가 절로 나온다. 위도 사람들로부터 ‘스마일 게’라는 별칭을 얻은 게다.

숲속 길을 한 20분 걸었을까. 툭 터진 전망이 나온 해안길이 나왔다. 변산반도 채석강, 적벽강처럼 옆으로 길게 지층을 이룬 특이한 바위들이 있는 해변이다. 그런데 눈앞에 등장한 절벽에 ‘와!’ 하는 탄성이 터져나온다.

호랑이의 눈? 공룡의 눈? 이구아나? 수십 개의 층으로 된 지층이 둥그렇게 말려 들어갔는데 그 모양이 꼭 동물의 눈동자처럼 생겼다. 처음 본 사람들은 호랑이의 눈 같다고 하기도 하고, 파충류의 눈동자처럼 기괴한 형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위도 사람들은 둥글게 말려 들어간 지층의 절벽을 보고 바닷가에 ‘큰 달’이 떴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른바 ‘대월습곡(大月褶曲)’이다. 습곡이란 지층이 물결 모양으로 주름이 지는 현상을 말한다. 부안 위도 진리 대월습곡은 일반적인 습곡과 달리,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지층이 말려 거대한 지층 구조를 만들어낸 횡와습곡이다. 대월습곡의 모양은 거대한 반원형 형태다. 원래 둥근달 모양이었는데, 절반이 잘려 나간 듯한 모양이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오랫동안 큰 달로 불러 왔다고 한다. 뚜렷한 지층 경계로 이뤄진 지름 40m의 거대한 원형 구조가 푸른 해안과 어우러져 수려한 절경을 이룬다. 어찌나 거대한 둥근달인지 바위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이 손톱만 해 보일 정도다.

모항 ‘생각하는 바위’. 

부안의 지질 명소는 이 밖에도 적벽강과 채석강, 솔섬, 모항 ‘생각하는 바위’ 등이 있다. 이런 지질 명소인 변산에서는 25∼27일 ‘무빙팝업시네마’ 행사가 열린다. 늦여름 황홀한 낙조를 배경으로 ‘변산’ ‘델타보이즈’ ‘태양은 없다’ 등 청춘을 주제로 한 영화가 상영된다.

● 두 섬 사이로 지는 왕등낙조

위도 해변도로에서 바라본 왕등섬 사이로 지는 노을 ‘왕등낙조’. 

위도 8경 중 하나인 ‘왕등낙조’는 서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 풍경으로 꼽힌다. 오후 7시가 좀 넘었을까. 위도해수욕장에서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붉은 해의 긴 그림자가 바다 위에 내려 비치고 있었다. 급하게 해안도로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높은 절벽 위에 놓은 해안도로였기 때문에 지는 해의 그림자가 수면 위로 유난히도 길게 번지고 있었다. 온 하늘과 바다를 붉은색으로 물들인 태양은 위도에서 약 20km 떨어진 두 개의 왕등도(상왕등도, 하왕등도) 사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일출이나 일몰이나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해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겠지만 이렇게 특정한 섬이나 산, 나무 등을 배경으로 해가 뜨거나 질 때 전국적 명소로 등극하게 된다. 애국가 배경화면으로 유명한 동해 추암해변은 촛대바위 때문에 해돋이 명소가 됐듯이 말이다. 두 개의 왕등도 사이로 정확히 떨어지는 노을은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서로 나란히 있는 섬이 갖고 노는 붉은 구슬처럼 보이는 태양. 어린 시절 해질 녘 친구들과 놀다가 엄마가 저녁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소리치던 모습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태양이 바닷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 하늘과 바다의 색감은 더욱 신비스럽고 오묘하게 변화한다. 해가 진 후 바다에서 20∼30분 머무르며 황홀한 색채의 향연 속에 사방이 어둑해지는 고요를 즐기는 것도 여행의 참맛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