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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칼럼]이승만도 김구도 獨立과 建國의 아버지들이다

입력 | 2023-08-20 23:51:00

‘1919년 건국 vs 1948년 건국’은 소모적 역사 내전
선언적 건국으로 시작해 실효적 건국으로 이어진 것
통치자가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 재단하면 위험
역사는 모노레일 아닌데… 둘을 한데 묶어낼 순 없나



정용관 논설실장


8·15를 기해 올해도 ‘건국’ 논쟁이 벌어졌다. 광화문 사거리엔 ‘8·15 대한민국 건국절’이란 어느 우파 군소 정당의 플래카드가 지금도 걸려 있다. 일부 우파 종교인도 “8월 15일 건국절로 정해 국가 정통성을 세우자”고 촉구하고 나섰다. “도둑같이 온 45년 해방보다 48년의 건국이 훨씬 값지다”는 어느 교수의 글에 이종찬 광복회장이 “해방은 도둑처럼 오지 않았다. 1945년 8·15와 1948년 8·15를 대립시키는 프레임은 옳지 않다”고 반박하는 일도 있었다.

광복 78주년, 건국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역사는 알면 알수록 뭐라 정의하기가 어렵다. 해방 공간의 복잡한 역사는 더더욱 그렇다. 특정 사관으로, 특정 사건이나 인물만 내세우면 자칫 ‘외눈박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을 쓰기도 무척 조심스럽지만 건국 논쟁, 아니 건국 ‘시점’ 논쟁의 쟁점 정리 차원에서 몇 가지 역사적 기록을 살펴볼 필요는 있다.

제헌 헌법 전문(前文)은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돼 있지만, 주목할 것은 유진오 초안에는 ‘기미 혁명의 정신을 계승’으로만 돼 있었다는 점이다. 독회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 선포’라는 표현을 넣자고 처음 제의한 사람은 국회의장이던 이승만이었다.

그 대한민국 정부가 1919년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한 한성정부를 말하는 건지,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탄핵을 당한 대한임정인지 명기되지 않아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김구 세력과의 역학관계가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그러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는 표현이 전문에 들어간 것은 40년 가까이 지난 1987년 개헌 때다. 당시 여당 측 헌법개정 대표위원이던 이종찬 의원(현 광복회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호를 둘러싼 논란도 간단치 않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했다. 정부의 관보 1호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돼 있다. 1919년을 기점으로 본 것이다. 이를 근거로 광복회장은 “올해는 대한민국 105년”이라고 한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연호를 쓰려 했던 건 북한과의 체제 경쟁, 역사적 정통성 경쟁을 염두에 둔 정치적 맥락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보면 제헌국회는 단기를 사용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쓰는 연호가 달랐던 것이다. 이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민족정기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헌국회는 표결을 거쳐 단기로 쓰기로 결정했다. 현재의 서기로 통일된 건 5·16 이후다.

한정된 지면에 해방 3년의 정치적 혼란이 정리돼 가는 과정을 담아내긴 어렵다. 분명한 건 공산세력에 맞설 민주공화정 수립에 앞장선 이승만과 “빨갱이든 김일성이든 다 우리와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는 이른바 ‘단군자손론’을 앞세운 김구의 길은 달랐지만 둘 다 박헌영 여운형 등 좌파와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야욕을 꿰뚫어 보았던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구도 강력한 반탁 운동을 통해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정부다. 그러나 3·1운동을 통해 왕정으로의 복귀가 아닌 ‘민국(民國)’으로의 전환을 선포한 정신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그 정신을 토대로 광복을 이루고 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해방 후 혼란을 딛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근대국가를 세우고 세계적인 중추국가로 성장해 나가는 중대한 시발점이 1948년 정부 수립이라는 사실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1919년 ‘선언적 건국’으로 시작해 1948년 ‘실효적 건국’으로 이어진 긴 흐름으로 볼 필요가 있다. ‘광복절 대 건국절’ ‘김구 대 이승만’의 역사 내전을 벌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절하된 상황에서 ‘1948년 건국론’이 나온 것이나, 이에 맞서 ‘1919년 건국론’이 제기된 과정을 새삼 장황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역사의 정치화’다. 어느 정권은 ‘건국 60주년’을, 어느 정권은 ‘건국 100년’을 내세운다. 정권이나 통치자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역사를 재단하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승만만 추앙(推仰)할 것도, 김구만 존숭(尊崇)할 일도 아니다.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하면서 큰 물줄기로 이승만과 김구를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들’로 묶어내야 한다. 역사는 모노레일이 아니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