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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 막는 ‘용면와’에 ‘수세식 화장실’… 신라궁궐의 비밀[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3-08-21 23:30:00

재성(在城)이란 두 글자가 좌우로 반전된 채 새겨진 와당. 신라의 왕성인 월성에서 주로 출토되는 기와다. 재성이란 ‘왕이 있는 성’의 의미로 해석된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고려 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기원전 57년에 세워진 이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바친 서기 935년까지 줄곧 경주에 도읍한 것으로 기록했다. 신라의 건국 시점을 그대로 수용하는 학자는 적지만 경주가 신라의 천년 왕도였음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른 신라만의 특별한 점이다.

경주는 그토록 오랜 세월 신라의 왕도였기에 어디를 발굴해도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쏟아진다. 그러나 지난 100여 년 동안 숱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었지만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궁궐은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조선으로 치자면 경복궁 근정전이나 사정전 같은 신라의 중요 건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안압지는 본래 신라 궁궐 연못 ‘월지’

경주 안압지(신라의 월지)에서 출토된 ‘용면와’. 지붕 모서리에 부착됐던 이 기와들은 악귀의 침범을 막는 기능을 했으며 해당 건물이 중요한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국립경주박물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초기의 왕성은 금성(金城)이었는데 파사왕 때 월성(月城)을 쌓은 다음 그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이후 월성은 오래도록 신라의 왕성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신라도 운명이 다해 935년 고려에 국권을 넘겨주고 만다.

그에 따라 화려하기 그지없던 신라 궁궐도 차츰 퇴락의 길을 걷다가 끝내 땅속에 매몰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에는 무너진 성벽을 가로질러 석빙고가 만들어졌고, 월지(月池)라 불린 궁궐 연못은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채 오리와 기러기가 노니는 연못이란 뜻의 안압지(雁鴨池)로 불리게 됐다.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월성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5년 3월의 일이다. 경주시가 안압지 준설작업을 하다가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자 정부는 긴급히 발굴단을 구성해 조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말까지 이어진 발굴에서 3만 점 이상의 유물이 쏟아졌는데, 특히 연못 바닥에서는 길쭉한 목재를 이어 붙여 만든 배, 술 마시며 내기 할 때 쓴 것으로 보이는 주령구를 비롯한 다량의 유물이 수습됐다.

더불어 못 서남쪽에서 정연하게 배치된 여러 동의 건물 터가 드러났다. 학계에선 월지에서 ‘동궁’이란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출토된 점을 근거로 그 주변을 태자의 거소인 동궁으로 비정하는 한편으로 월지 주변의 건물 터를 신라 때 군신들이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는 임해전(臨海殿) 터로 특정했다. 이 발굴을 통해 신라 궁궐의 범위가 월성에 한정되지 않고 더 넓었음을 알게 되었다.

방어기능 해자, 통일 후 조경용으로
1980년대 초 월지와 월성을 함께 정비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기획되었고, 그 일환으로 1984년부터 월성을 감싼 해자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다. 월성의 둘레가 2.34km나 되기 때문에 해자 발굴에는 무려 38년이나 소요됐다. 이 발굴을 통해 월성해자가 처음엔 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방어시설로 기능했지만 통일 후 궁궐이 확대되면서 조경용 연못으로 바뀌었음을 알게 됐다.

2014년부터 월성 내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1979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시장의 요청을 수용해 월성 발굴을 지시했다. 그러나 문화계 인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차일피일 미뤄지던 중 박 대통령이 시해되면서 월성 내부 발굴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세월이 흐른 뒤 월성 발굴 및 복원이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대선 공약에 들어갔고 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 월성 발굴에 많은 기관이 투입되어 속도전을 벌여야 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논란이 벌어졌는데 결국은 국가기관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단독으로 장기간에 걸쳐 조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남에 따라 가까스로 발굴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월성 내부 발굴에서 통일신라 건물 터 다수가 드러났고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건물이 신라 궁궐의 정전인지 혹은 편전인지 등 구체적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발굴 결과는 1970년대 월지 발굴 결과를 소환했다. 근래 월성 안에서 확인된 그 어떤 건물지보다 더 크고 정연한 월지 서남쪽 건물지 3동을 통일신라의 중심 건물군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성 내부 발굴과 병행하여 조사단은 성벽에 대한 절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현재 남아 있는 월성 성벽은 4세기 무렵 처음 축조되었고 그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2017년에는 성벽 하부에서 2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인골 주변에는 토기 몇 점이 놓여 있었다. 조사단은 신라가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산 사람을 죽여 묻은 ‘인신공양’의 흔적일 것으로 추정했다.

신라 북궁과 남궁 위치, 아직 수수께끼

동궁 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 화장실. 하부에 오물 배출을 위한 배수로가 있고 장방형 석재 2개가 걸쳐 있는 등 요즘의 수세식 변기와 구조가 비슷하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월성에 대한 조사와는 별개로 2007년부터 월지 동북쪽에 대한 발굴이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동궁을 구성하는 여러 건물지가 정연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이 발굴을 통해 과거 동궁을 월지 일대로 보던 견해에 대신하여 월지 동쪽에 동궁이 별도로 존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울러 황룡사 서쪽에 남북으로 시설된 넓은 도로에 접하여 신라 궁궐 동문 터가 위치함이 밝혀졌다.

2016년에 발굴된 아주 작은 금박에는 요즘의 첨단 도구와 기술로도 새기기 어려운 크기의 꽃과 새 무늬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어 신라 세공 기술의 높은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2017년에는 통일신라 화장실이 발굴돼 눈길을 끌었다. 돌을 깎아 만든 변기와 오물 배출을 위한 경사 배수로가 세트로 확인되었는데, 특히 변기 모양이 현대 변기와 비슷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처럼 월성과 월지를 포함한 신라 궁궐에서는 수많은 자료가 쏟아져 나왔고 그것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신라사의 이모저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신라 궁궐의 중핵에 해당하는 주요 건물 터, 삼국 통일 이전의 건물 터 등이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다. 또한 역사기록과 유물에 등장하는 북궁과 남궁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장차 새로운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이러한 여러 수수께끼가 차례로 풀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