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왼쪽)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년)의 주인공 구스타브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축제극장의 ‘모차르트의 집’에서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감상했다. 감흥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극장 앞 막스 라인하르트 거리로 나오자 거리 끝 동쪽의 잘츠부르크 대성당이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5년 전 이 극장 바로 위 ‘츠바이크의 집’에서 밤의 대성당을 내려다본 기억이 떠올랐다. 소설가 겸 극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도 모차르트가 유아세례를 받은 이 성당을 매일같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츠바이크와 역시 오스트리아의 문인이었던 후고 폰 호프만스탈(1874∼1929),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라는 세 천재를 떠올렸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전으로 끝난 직후인 1920년 호프만스탈과 슈트라우스, 공연기획자 막스 라인하르트의 주도로 창립됐다. 오늘날도 매년 축제 개막일이면 대성당 앞에서 행진이 펼쳐지고 호프만스탈의 연극 ‘예더만’이 공연된다. 츠바이크는 전쟁 중에 잘츠부르크로 이사해 살고 있었다. 축제의 창립에 관여하지 않았던 츠바이크는 자서전인 ‘어제의 세계’에 이렇게 적었다.
자서전 앞부분에서 츠바이크는 호프만스탈에 대해 ‘우리를 매혹시키고, 도취시키고, 감격시킨 한 사람, 단 한 번의 기적적 현상’이라고 적었다. 필명으로 데뷔하며 오스트리아 전 문단을 주목하게 만든 호프만스탈이 십대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사람들이 경악했다는 일화도 곁들였다.
호프만스탈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 등 여섯 편의 대본을 쓰며 ‘황금 콤비’를 이룬 작가이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대본 작가를 잃은 슈트라우스는 츠바이크에게 다음 작품의 대본을 의뢰했다.
두 사람이 오페라 ‘말없는 여인’을 작업 중이던 1933년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의 정권을 장악했다. 옆 나라 오스트리아에 살던 츠바이크는 유대인이었다. 슈트라우스는 ‘대본 작가의 이름을 밝힌 가운데’ 이 작품을 초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히틀러는 예외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단 두 번 공연 뒤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번갯불이 하늘에서 번쩍였다’. 이후 공연들은 취소되고 슈트라우스는 ‘독일제국음악성’ 대표직에서 해임됐다. 슈트라우스가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가 경찰에게 압수된 것이다. “내가 ‘순수’ 독일인이라는 생각을 가진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차르트가 작곡을 하면서 ‘나는 아리아인’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내게는 두 가지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재능 있는 사람과 재능 없는 사람이죠.”
한때 ‘나치 협력자’라는 비난의 시선을 받았지만 슈트라우스가 다시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는 작곡가로 지위를 회복한 점은 한때 ‘파시스트가 사랑한 작곡가’로 비난받았던 이탈리아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1879∼1936)와도 비슷하다. 그는 파시스트의 어떤 공직도 맡지 않았으며 반파시스트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시위대의 공격에 둘러싸이자 앞장서서 그를 구출했다.
관현악의 표현적 기능을 최고로 발휘한 작곡가였다는 점 외에도 슈트라우스와 레스피기에게 공통된 점은 권력의 압력 속에서 보인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츠바이크와 토스카니니가 각각 남긴, 두 사람에 대한 감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