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파괴자인가 구원자인가”…오펜하이머의 핵분열과 핵융합

입력 | 2023-08-22 06:10:00

핵분열과 핵융합, 대량살상무기 원자·수소폭탄에 활용돼
원자력 발전·인공태양 등 에너지 혁신 위한 핵심 기술되기도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유명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가장 잘 알려진 어록이다. 그는 세계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 성공 이후 이같은 말을 남겼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영화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개봉 첫 주말부터 관객 150만명을 돌파하며 21일 기준으로도 16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장장 3시간에 걸쳐 줄리어스 오펜하이머라는 한 인간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영화의 시작부터 ‘핵분열(fission)과 ’핵융합(fusion)‘이라는 부제로 장면을 컬러와 흑백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핵분열에는 색을 입히고, 오펜하이머가 반대했던 핵융합에서는 색을 배제했다.

◆세상의 파괴자 : 인류 최악의 무기 원자폭탄·수소폭탄 근간된 핵분열·핵융합

영화 오펜하이머를 관통하는 핵분열과 핵융합은 현대 사회, 나아가 미래 사회에서도 필수적인 기술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들 기술은 오펜하이머의 말대로 세상의 파괴자가 될 수 있는 인류 최악의 무기에도 사용될 수 있고, 반대로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는 세상의 구원자 역할을 할 수도 있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핵분열은 원자폭탄, 핵융합은 수소폭탄을 만드는 원리로 사용된다. 당초 오펜하이머의 맨해튼 계획부터가 2차 세계 대전을 빠르게 끝내기 위한 신무기를 개발하기 위함이었다.

핵분열은 질량 수가 큰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 충돌과 같은 외부 힘에 의해 더 가벼운 원자핵으로 쪼개지는 현상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초고온의 에너지를 사방으로 방출시켜 폭발력을 내는 것이다. 핵분열에 필수적인 무거운 원자핵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료 사용되는 것이 바로 우라늄-235나 플루토늄-239 같은 방사성 동위원소들이다.

이같은 원자폭탄의 위력은 처음이자 마지막 원폭 사용이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례에서 이미 증명됐다. 단 2개의 폭탄으로 수십만명의 사람이 폭사한 것. 극초기 형태였던 리틀보이와 팻맨의 위력은 약 16Kt(킬로톤)과 21Kt 수준이다. 폭발성 화학물질인 TNT 1만6000톤, 2만톤을 동시에 터트린 것과 같은 위력이다.
오펜하이머가 개발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수소폭탄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수소폭탄은 핵융합과 핵분열의 원리를 모두 활용한다. 핵융합 반응 촉진을 위한 뇌관으로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핵융합은 핵분열과 반대로 2개의 원자핵이 부딪혀 무거운 하나의 원자핵으로 변환되는 반응이다.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 원자핵끼리 핵융합을 하기 위해서도 약 1억℃ 이상의 열이 필요하고, 더 무거운 원자핵의 경우에는 이보다도 고온의 환경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핵융합을 활용한 폭탄에 가장 가벼운 재료인 수소를 활용하고, 수소라는 이름까지 붙은 것이다. 원자폭탄이 뇌관으로 사용되는 것도 핵융합을 위한 초고온 환경을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간의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가장 위력이 높은 수소폭탄으로 알려진 것은 소련(현 러시아)의 ’차르 봄바‘다. 차르 봄바의 위력은 50만Mt(메가톤)으로 TNT 5000만톤을 동시에 터트린 것과 같다. 지진 규모로 환산해도 8.0을 넘는 수준이다.

물론 이렇게 강력하고 위험한 무기인 만큼 수소폭탄 개발은 원자폭탄보다도 한 차원 더 어려운 수준이다.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은 1952년 미국의 ’아이비 계획‘에서 이뤄졌으며, 7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수소폭탄 개발을 위한 핵융합 반응을 제대로 구현한 것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5개국 뿐이다.

◆세상의 구원자 : 고효율 에너지 만드는 핵분열, ’꿈의 에너지‘ 핵융합

물론 핵분열과 핵융합이 이처럼 살상용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 현재에도 쓰이고 있는 원자력 발전은 핵분열 에너지를 활용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의 원리는 핵분열 반응에서 발생하는 열로 물을 끓이고, 거기서 나오는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원자력 발전의 최대 장점은 에너지 효율이다. 적은 연료로도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 주 원료인 우라늄 1㎏만으로 석유 200만 리터, 또는 석탄 3000톤이 내뿜는 에너지와 비슷한 양을 얻을 수 있다. 화석 연료와 비교했을 때 온실가스 배출 등이 적다는 것도 분명한 장점이다.

물론 핵분열을 활용한 원자력 발전은 장점만큼 위험성도 크다. 반감기가 수억년에 달하는 우라늄 등을 원료로 쓰기 때문이다. 우라늄 원료를 원자로에서 태운다 해도 수억년 동안 방사능을 내뿜는 ’고준위 방폐물‘이 그대로 남아 세계 각국이 골머리를 썩고 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원자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말 그대로 핵폭발이 발생하는 대재앙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꿈의 에너지‘로 불리는 핵융합 발전(인공태양)에 대한 연구가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핵융합 발전의 원리는 가벼운 원소의 원자핵을 초고온, 초고압 상태에서 융합해 더 무거운 원자핵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이다. 같은 양의 힘을 투입했을 때 나타나는 에너지의 양도 핵분열보다 더 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핵융합은 이처럼 에너지 효율이 막대하면서 위험성도 적다. 바닷물이나 리튬에서 추출할 수 있는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주원료로 쓰는 만큼 방사선폐기물 문제에서 자유롭다. 그나마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은 핵융합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성자선인데, 핵융합 발전소에서 차폐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유출된다 해도 자연 상태로 간단히 희석될 가능성이 크다.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폭발 위험성도 핵융합 발전에는 없다. 핵분열 발전의 경우 핵분열을 일으켜 에너지 생산하는 게 쉬운 대신, 냉각 제어를 실패하면 연료가 스스로 열을 끝없이 방출하며 멜트다운 후 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반면 핵융합은 초고온, 초고압이라는 조건 충족을 비롯해 융합 자체를 일으키는 게 굉장히 어렵고, 융합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결국 별다른 제어를 하지 않아도 인위적인 융합 시도를 멈추면 에너지가 순식간에 식어버리게 된다. 또한 극소량의 수소 연료를 필요할 때마다 융합로에 조금씩 넣으면 되기 때문에 제어 자체도 쉽고 애초에 폭발이 일어날 만한 연료도 없다.

세계 최초의 핵실험 성공 이후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는 오펜하이머의 말은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비슈누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세상의 파괴자라는 자칭과 달리 비슈누는 세상의 유지를 담당하는 힌두교의 가장 위대한 신 중 한 명이다. 오늘날 핵분열과 핵융합이 갖고 있는 위험성과 효용성을 모두 생각한다면 이 또한 오펜하이머의 탁월한 통찰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