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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의료사고’ 12억 배상판결…“산부인과 기피 우려”

입력 | 2023-08-23 14:07:00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거액 배상책임 가혹”
“소아과 위기 재현 우려…국가보상 늘려야”




뇌성마비로 태어난 신생아의 분만을 담당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료계에서 생명을 살리는 필수의료 중 하나인 산부인과 기피 현상이 심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제1민사부는 지난 5월 신생아의 부모 등이 의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의사 측이 부모 측에 12억5552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의료진이 임산부에 대한 상태관찰에 소홀해 신생아가 뇌성마비로 인한 장애를 입게 됐다고 판단했다. 유도분만 예정일 하루 전인 2016년 11월20일 임산부는 태동이 평소보다 줄었다며 병원에 전화해 증상을 말했고 병원은 태동검사를 위해 내원하라고 했다. 이후 태동검사를 위해 A씨가 병원에 내원한 직후 간호사가 분만 전 처치로 관장을 시행했다.

재판부는 “의료진이 원고의 분만 과정에서 태동 및 태아 심박동수의 변화를 면밀하게 측정·관찰하고 변화가 있는 경우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등 태아곤란증 여부를 판별하고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일반인의 상식에 바탕을 둔 의료상 과실이 있는 행위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또 “태동검사를 위해 A씨가 병원에 내원한 직후 간호사가 아닌 의료진이 태동의 감소 여부와 정도를 확인했다면 태동이 감소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추가 검사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고, 추가 검사를 통해 태아곤란증 등의 이상상황이 보다 이른 시기에 발견돼 그에 따른 조치가 적시에 취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의료계에서는 거액의 배상책임을 물은 이번 판결에 대해 “충격적이다”, “가혹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분만 전 태아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의학적 한계 속에서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최선을 다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거액의 배상 판결을 내린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태아가 산부인과에 오기 전부터 태아곤란증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법원이 이를 간과했고, 의료진은 야간 응급수술과 처치에 신속히 대처해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이다.

의사회는 “임산부가 병원에 내원했을 당시 이미 태아 심음의 변동성 소실이 있었다는 기록만으로도 태아곤란증을 의심할 수 있는데 법원이 이를 간과했다”면서 “또 내원 당시 이미 태아곤란증이 있었다는 것은 자궁 내 감염이 그 원인일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 “의사는 태아심박동 감소가 처음 시작된 이후 33분 만에 응급 제왕 절개술을 결정하고 21분 만에 수술을 시작한 후 8분 만에 출생시켰는데 이런 기록으로 보아 야간 응급수술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속하게 대처한 것”이라면서 “당시 병원에는 산부인과 당직의가 한 명이었음에도 응급 제왕절개술을 진행하고 119구급대와 함께 신생아의 활력징후를 유지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의료현장을 떠나거나 산부인과 기피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상반기 레지던트 모집 결과 산부인과 지원율이 75%까지 올랐는데, 이번 판결의 영향으로 내년에 산부인과 지원자가 뚝 떨어질 것”이라면서 “어느 전공의가 지원을 하겠느냐, 또 산부인과를 지원한다고 하면 부모가 허락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법원은 출생 당시 생체 활력 증후가 전혀 없이 출생한 신생아를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려내서 상급병원에 전원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배상책임을 지게 했다”면서 “이번 판결로 분만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분만 현장을 떠나게 될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또 “분만의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산부인과 의사들이 더 견뎌야 할 이유가 이번 판결로 사라지고 있다”면서 “상급심에서는 법원이 공정하고 현명하게 판단해 줄 것을 거듭 요청한다”고 촉구했다.

앞서 대한산부인과학회도 성명을 내고 “분만은 본질적으로 내재한 위험성으로 산모나 태아의 사망, 신생아 뇌성마비 등 원치 않은 나쁜 결과가 일정 비율로 발생한다”며 “이는 피할 수 없고 그 원인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선의의 의료행위를 한 의료인에게 거액의 배상 책임을 묻고 가혹하게 처벌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불철주야 애쓰는 산부인과 의사를 위축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킨다“며 ”선의의 의료행위 후 발생한 일부 나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담당 의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누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주장했다.

의료계에서는 소아청소년과 붕괴 위기가 산부인과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의료사고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의 경우 의료진 개인이나 의료기관에 가혹한 책임을 지우는 대신 국가가 보상해 분만 인프라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몇 년 전 이대 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 이후 소아과 기피 현상이 심화됐듯 산부인과 지원율도 더 떨어지는 것 아니냐”, “저출산이 얼마나 심각한데 배상 금액을 보면 판사들이 판결이 사회에 미칠 파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산부인과 지원율이 저조한데 전공의부터 사라질 것 같다”는 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중신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은 “국가보상제는 보상액이 최대 3000만 원에 그쳐 소송 규모가 10억 원대에 이르는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며 “저출산 시대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산부인과 의사가 사라지고 분만할 병원도 부족해진다. 국가 보상액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불가항력적 의료사고 피해자를 위한 보상 재원을 정부가 100% 마련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오는 11월 시행될 예정이다.

의료인이 분만 과정에서 주의 의무를 충분히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환자에게 보상금을 지원한다. 국가 70%, 의료기관 30%였던 보상 재원 부담을 국가가 100% 담당하게 됐지만, 지원 금액은 최대 3000만 원이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