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규제에 무너지는 중기 생태계] 〈4〉 ‘덩어리 규제’ 화평법-화관법
결국 그는 최근 개발한 2가지 화학물질은 개발만 한 뒤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하고 있다. 이를 외주로 돌리면 기술 유출 우려가 있는 데다 수익까지 줄지만 국내서 각종 비용에 휘청이느니 차라리 해외 생산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올해 시행 9년째를 맞은 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 중소기업의 비용 부담을 키우는 ‘덩어리 규제’라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영세 중소기업이 비용 부담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 화학물질 생산을 포기하거나 폐업까지 검토하는 사례가 나온다. 정부가 신규 화학물질 등록기준 완화 등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복잡한 허가 절차 등 중소기업의 고충을 해소하려면 더 적극적인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0.1% 함유된 물질도 신고해야… 화관법 규제로 폐업 고민”
법 맞추려 시설교체-정기검진-교육
영세기업들 비용-인력 감당 힘들어
중기 납품 지연에 대기업 생산 차질
“화학물질 등록-관리 전면 개선해야”
영세기업들 비용-인력 감당 힘들어
중기 납품 지연에 대기업 생산 차질
“화학물질 등록-관리 전면 개선해야”
충북 화학물질 폐기물 종합 재활용 업체 B사에서 직원이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시행 당시 교체한 화학 폐기물 보관 탱크를 가리키고 있다. 이 회사는 화관법 시행 당시 약 5억 원을 들여 탱크 7대를 교체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8일 찾은 충북의 화학 폐기물 종합 재활용 업체인 B사. 축구장보다도 더 넓은 규모(약 1만㎡)의 회사 마당에 큰 탱크 7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 탱크들은 높이만 4.5m로 일반 건물 실내 층고보다도 높았다. 화관법 시행 당시 5억 원을 들여 교체한 탱크다. 당시 교체 주기가 꽤 남았는데도, 저장탱크가 부식과 손상을 견디는 재질이어야 한다는 화관법 규정에 맞추려 연 매출의 15% 넘는 비용을 들여 바꿨다. 주차장에 놓인 주황색 폐기물수집운전차량 5대도 매년 130만 원을 들여 정기검진을 받고 있다. 화관법 시행 당시 1000만 원을 들여 설치한 가스 감지기 8대의 유지보수비도 매년 300만 원이 든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직원들이 폐기물관리법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정기 교육을 받고 있는데, 화관법에 따라 별도의 물질 취급자 교육 등을 2년에 한 번 또 받아야 한다. 이 때문에 직원 한 명이 1년에 2번씩 교육받는 경우도 있다. 매출 30억 원에 직원이 20명도 안 되는 영세 기업에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이 회사 관계자는 “위험물안전관리법에 따라 소방서 등에서 차량 검진을 받는데, 비슷한 검사를 따로 비용을 들여 외부 업체에 의뢰해서 또 받아야 한다”며 “화학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업체인데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다른 업체와 똑같이 규제를 받고 있다”고 했다.
●“화학물질 하나 등록하는 데 30억 원”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관법은 2012년 9월 경북 구미 불산 누출 사고와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이후 화학물질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전면 개정해 2015년 시행됐다.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 중소기업 현장에서는 비용과 인력 부담이 지나치게 커서 현실적으로 ‘지키려야 지킬 수 없는 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화평법은 신규 화학물질 및 연간 1t 이상 제조·수입되는 기존 화학물질에 대한 유해성 심사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화평법에 따라 화학물질을 신규 등록하기 위해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할 경우 자료 확보에만 3, 4개월이 걸린다. 비용은 물질당 최소 3000만 원에서 최대 수억 원까지도 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체들이 여러 물질을 한꺼번에 취급하는 특성상 물질 수만큼 관련 비용이 늘어나는 구조다.
여기에 외국에 이미 유해성 정보가 있을 경우 이를 구매하는 경우도 많은데, 같은 물질이라도 각 기업이 저마다 등록하다 보니 중복 구매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화평법에 따라 화학물질을 등록하고 나서도 끝이 아니다. 기업들은 화관법에 따라 국내에서 100kg 이상 화학제품을 유통시킬 경우 모든 성분과 함유량을 정부에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여기에 화학물질 유출 사고를 낼 경우 해당 업체 매출의 최대 5%까지 과징금이 부과된다. 방지벽·경보장치 설치 등 300개가 넘는 시설 기준을 맞추지 못하면 기업 대표가 최고 5년 이하 징역이나 최고 1억 원의 벌금을 받는다.
경기에서 유기용제를 재활용하는 사업을 하는 C업체는 최근 화관법 규제로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 화관법에 따르면 폐유기용제에 들어있는 모든 용액 종류를 신고해야 한다. 여러 물질이 혼합돼 있는 폐유기용제 특성상 소량 포함된 물질까지 파악해서 모두 신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C사 관계자는 “0.1% 함유된 물질을 우리가 파악하기도 어렵고, 폐유기용제를 제공한 업체조차 용액에 어떤 물질들이 섞여 있는지 정확하게 모른다”며 “어차피 행정처분을 받아 사업을 접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폐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라고 하소연했다.
●기업 제출 시험 자료만 47가지…“산업 경쟁력 약화”
중소기업들이 이처럼 어려움을 겪으면서 재계에서는 산업 전반의 활력이 저해된다는 목소리가 크다. 협력업체가 물질 등록 등으로 납품이 지연돼 대기업도 제품 개발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 대표적으로 한 반도체 업체의 경우 화평법 도입 후 협력업체가 신규 화학물질을 등록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어서 최소 6개월 미리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야 납품 기한(납기)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시라도 빨리 개발을 해야 많은 고객을 선점할 수 있는데 협력업체에서 납품이 지연되면 개발도 덩달아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환경부가 화평·화관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전면적인 규제 완화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부는 화평법의 경우 등록해야 하는 신규 화학물질 기준을 1t으로 늘리고, 화관법에 따른 정기검사 주기를 기존 1~2년에서 1~4년까지 차등을 두는 등의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신체 노출 가능성이나 용도 등에 따라 차등화하지 않고 독성이 기준치에 해당하기만 하면 똑같이 규제하는 점, 징역형까지 가능한 과도한 처벌 등 기존에 중소기업계가 꾸준히 요구해온 개선점은 아직 반영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또 재활용업계의 경우 폐기물관리법과 화관법 양쪽에서 중복해 규제를 받는 만큼 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화학물질 등록 및 관리 체계 자체를 전면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중기중앙회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화학물질 제조·수입 기업은 확보 가능한 자료만 제출하고 이후 정부 주도로 유해성 정보 확보 및 위해성 평가를 진행한다. 일본은 기존 화학물질은 정부가 우선순위에 따라 평가 대상 물질 목록을 작성, 평가하고 필요한 경우에만 제조·수입자에게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신규 화학물질 등록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조치이지만 여전히 기업이 제출해야 하는 시험자료만 47가지”라며 “미국과 일본처럼 화학물질 등록을 기업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해 수행하고, 기업은 필요할 때만 보완하도록 한다면 중복구매 등 비효율을 줄일뿐더러 기업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 인력 모자란 중기 “면피용 서류 작업에 현장 못지켜”
내년 중대재해법 적용 사업장 비상
현장마다 안전관리자 둬야 규정에
“비용 탓 채용 힘들어 안전 뒷전 우려”
충남의 한 중소 건설업체 엔지니어 A 씨는 회사가 안전보건관리자를 뽑지 못해 현장 관리소장까지 겸하고 있다. 그는 “최근 반도체와 조선업계 쪽으로 안전 인력이 쏠려서 안전관리사 일당이 15만 원에서 20만 원 선까지로 올랐다”며 “대기업은 일당으로 30만 원까지 제시해 중소기업에 사람이 오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현장마다 안전관리자 둬야 규정에
“비용 탓 채용 힘들어 안전 뒷전 우려”
내년 1월부터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도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법)이 적용되는 가운데 중소기업들의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영세 업체는 안전인력 채용 자체가 어려운 데다 처벌을 피하기 위한 서류작업 등으로 오히려 법 취지인 안전은 뒷전이 된다는 설명이다.
현장마다 안전보건관리자를 두도록 한 규정은 사실상 지키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크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20여 명 규모 중소 건설업체라면 현장 직원은 5명 정도인데 월급이 500만 원 선인 안전보건관리자를 추가 채용해야 한다”며 “영세 기업은 안전관리자 인건비가 기업 영업이익과 맞먹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산업현장 안전에 관한 법규인 산업안전보건법이 있고, 업종마다 안전관리 법규까지 따로 있어 중대재해법이 중복 규제라는 지적도 많다. 충남 천안의 운수업체 직원 B 씨는 “운수업은 도로교통법에 따라 교통안전관리자를 별도 선임하는데, 중대재해법상 안전관리자를 또 선임해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이미 안전관리자를 채용하고 중대재해법을 적용받는 50인 이상 사업장에서도 중대재해법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건설업체 관계자는 “안전관리자가 현장에서 근로자들을 감독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처벌을 피하기 위한 서류작업에 시간을 더 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이 확대될 경우 ‘잠재적 범죄자’를 양산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중대재해법은 현장에서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했고 안전보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 경영책임자 등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 10억 원 이하 벌금을 규정하고 있다.
중소 제조업체 직원 C 씨는 “외주 업체들을 검사하러 다니면 100곳 중 99곳은 서류상으로만 조건을 맞춰둔 채 안전관리사 없이 현장을 운영하고 있다”며 “오히려 관련 서류작업을 하느라 인력만 소모되는데, 규정이 강화되면 이런 기업이 더 늘 것”이라고 했다.
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