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번역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사진 출처 이베이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역병 앓고 ‘보고서’ 남긴 투키디데스
펠레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나이인들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도시부터 가장 가까운 항구까지 긴 장벽을 쌓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인구가 밀집되면서 역병이 창궐하게 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역병은 머리 꼭대기에서 시작해 온몸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첫 증상은 고열과 눈의 충혈이었다. 목구멍과 혀에서 피가 났고 호흡 곤란과 악취가 이어졌다. 가슴 통증과 기침, 복통도 따랐다. 피부도 성하지 않았다. 피멍과 농포와 종기가 몸을 덮었고, 사람들은 고열을 못 견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역병은 사람들을 물에 뛰어들게 했을 뿐 아니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체질이 강하든 약하든 일단 이 병에 걸리면 차이가 없었으니, 이 병은 평소 건강 관리에 관계없이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낚아채 갔다. 역병의 가장 무서운 점은 병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면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과 사람들이 서로 간호하다 교차 감염되어 양떼처럼 죽어가는 것이었다.”(천병희 옮김) 짐승들조차 방치된 시신에 다가가지 않았고 온 나라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의 법도 구속력이 없었다.”
역병의 정체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천연두, 발진티푸스 등의 증상에 가깝다. 하지만 무슨 역병이었는지 몰라도 우리는 그 끔찍한 상황에 쉽게 공감한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를 겪었고 지금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백신이나 의학적 처방이 없다면 우리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내전과 역병에 무너진 가치와 도덕
플랑드르의 화가 미힐 스베이르츠(1618∼1664)의 작품 ‘고대 도시의 역병’. 아테나이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전쟁 발발 이듬해 아테나이를 덮친 역병을 생생히 기록했다. 천연두 혹은 발진티푸스로 추정되는 이 역병으로 당시 아테나이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됐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전래의 가치와 도덕이 무너졌다. 도덕은 자기변명과 타인 공격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바꾸면 더 실감이 날지 모르겠다. 비리를 고발하는 용기는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정의로운 행동은 ‘어리석음’으로, 성실함은 ‘꽉 막힌 태도’로 낙인찍힌다. 2400년 전 상황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인간의 본성’이 같고 지금의 현실이 ‘전쟁 같은 경쟁’이기 때문이 아닐까?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리얼’하다. 이 ‘리얼리티’가 서양 사상가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거기서 위선과 허위의 가면이 벗겨진 인간의 맨얼굴, 도덕의 굴레를 내던진 인간의 본모습을 보았다. 문명 세계를 벗어난 정글 속 인간의 모습이랄까. 하지만 더 따져보자. 홉스 등이 상상한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그려진 인간의 모습이 진짜 인간 본성의 본모습일까?
분명 그것을 두고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전쟁 속’ 인간의 모습일 뿐이니까. 그것만이 인간 본성의 전부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평화 역시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 본성의 진짜 모습은? 진실은 그 중간, 즉 전쟁과 평화에서 달리 나타나는 인간의 양면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도덕의식은 악을 응시할 때 생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야누스적이다. 이 점에서 동물들과 다르다. 동물들은 도덕을 세우지도, 그것을 뒤엎지도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본성의 양면성 탓에 신적인 상승과 악마적 추락을 거듭한다. 타고난 본성이니 바꿀 수도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본성의 실현 조건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계해도, 경계가 느슨해지는 순간 인간은 악마적 존재로 추락한다. 투키디데스는 전쟁, 내분, 역병의 상황에서 드러난 인간의 양면적 본성을 기술했지만 인간 본성의 악마적 일면이 웃는 얼굴로 활보하는 것이 어디 그때뿐일까? ‘평화’ 속에서도, 금지된 쾌락에 대한 상상과 일탈의 욕망이 날개를 달고 솟구치는 21세기 ‘유튜브 시대’에도 도덕의 고삐가 풀린다. 이런 시기는 언제나 ‘전쟁, 내분, 역병’의 상황이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도덕’을 따르라는 말인가? ‘도덕’은 시대와 사회마다 다르지 않나? ‘도덕’이나 ‘교화’의 이름으로 행사된 폭력의 사례들이 역사에 가득하다! 맞다. ‘도덕의 고삐’보다 ‘고삐 풀린 자유’가 더 낫다는 주장이 호소력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투키디데스 읽기가 필요해진다. 어떻게 투키디데스가 그린 인간의 지옥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로 이 물음이 ‘도덕’에 대한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 될 테니까.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들의 핵심도 그것이다. 그가 투키디데스의 동시대인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덕의식은 악의 응시에서 생긴다. 이 응시에는 인간의 악에 내몰린 다른 본성(선한 본성)에 호소하는 힘이 있다. 이렇게 뒤집어 말할 수도 있겠다. 세상의 악을 외면하는 ‘긍정주의자’의 시선, 이것이 악의 뿌리일 수 있다. 그런 시선은 불행을 견디는 치료제일 수 있지만 이 치료제의 과다 사용은 더 큰 불행과 파탄을 부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분명 긍정할 것과 부정할 것이 함께 있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