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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시대와 ‘세계관 스토리텔링’[문화 프리즘/김명진]

입력 | 2023-08-24 23:42:00


불 원소족의 딸과 물 원소족의 아들이 사랑에 빠진다. 둘은 상극이라 손을 맞잡는 것마저 조심스럽다. 물에 닿아 일그러진 불은 나무를 조금 씹어 먹으면 금세 다시 활활 타오르고, 불의 열기로 증발한 물은 끝없이 샘솟는 눈물로 마른 몸을 채워 다시 흐른다.

김명진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극작가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가 사는 엘리멘트 시티 속 불과 물의 사랑을 담은 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사진)의 한 장면이다. ‘원소들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불과 물이 사랑에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작은 상상으로부터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캐릭터들이 하나둘 생명을 얻었을 이 이야기는 ‘세계관 스토리텔링’의 힘을 잘 보여준다.

세계관 스토리텔링(Universe Storytelling)이란, 새롭게 설정된 규칙에 지배되는 가상세계 배경의 이야기를 만드는 작법으로 판타지 장르를 주로 다루는 게임, 웹툰, 애니메이션, 영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드라마 기획에서 활용된다. 특히 요즘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트랜스미디어 전략으로도 확장되면서 MZ세대의 스토리텔링으로 인식되고 있다. 각 아이돌은 고유한 세계관 속에서 요정이었다가 전사가 되기도 하고, 뱀파이어였다가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으로 다양한 변신을 시도한다.

세계관 스토리텔링은 전통적 스토리텔링에 비해 욕망이나 갈등과 같은 인간적 요소는 다소 평면적으로 제시하되, 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을 엄격하게 다루는 편이다. 실제 산업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세계관 스토리텔링의 범위는 단순히 ‘불과 물이 사랑에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순수한 상상력의 영역만은 아니다. 그들이 사는 도시의 경제, 인구, 기후, 직업, 여가 등 세부 설정 하나하나 그럴듯한 논리적 규칙과 물리적 질서가 요구된다. 그래서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는 일은 현실의 정치, 경제, 역사, 사회, 과학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문화산업현장에서 통용되는 세계관이라는 말은 본래 ‘세카이계(せかい系)’라는 일본 서브컬처 용어에서 온 것으로 1990년대 중반 큰 인기를 끌었던 ‘에반게리온’이 그 담론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대재앙과 함께 정체 모를 괴물들의 공격을 받게 된 인류가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다루는 이 이야기에서는 나이 어린 주인공들이 ‘홀로’ 거대한 세계와 마주하게 되는데 이들 주변에는 그들을 돕는 어른이나 사회적 시스템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외롭고 잔인한 서사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중심이 인간에서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오직 나와 세계뿐인 이야기, 나 홀로 세계를 대면하는 이야기는 왜 다시 유행하는 걸까. ‘고립의 시대’의 저자 노리나 허츠는 뉴미디어 기술이 발달한 초연결 시대와 함께 엄습한 집단적 고립감의 아이러니를 말한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연결되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워졌다. 나날이 진화하는 디지털 플랫폼과 결합된 다양한 세계관의 이야기들은 화려한 가상현실로 우리를 초대한다. 메타버스 시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데, 인간은 여전히 홀로 그 세계를 대면하는 중이다.





김명진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