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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서정보]‘블루스폿’의 기사… 신진서, 14년 만에 응씨배 우승

입력 | 2023-08-25 00:09:00


프로바둑 해설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블루스폿(blue spot)’이다. 보통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아 해설하는데 인공지능이 다음 ‘최선의 수’를 파란 점으로 표시하기 때문이다. 블루스폿에는 이길 확률도 %로 표기되기 때문에 바둑의 유불리를 금방 알 수 있다. 블루스폿과 일치율이 가장 높은 기사로는 신진서 9단이 꼽힌다. 그의 별명이 ‘신공지능’인 이유다.

▷신 9단이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9회 응씨배 결승 2국에서 중국의 셰커 9단에게 승리하며 종합전적 2-0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 기사의 우승은 14년 만이다. 원래 2021년 결승전이 열렸어야 했지만 결승만큼은 대면 대국으로 하고 싶다는 주최 측의 바람 때문에 2년여 늦어졌다. 신 9단의 응씨배 우승은 개인적으론 명실상부 세계 1인자의 위치를 굳혔다는 의미가 있다. 한국 바둑계로서도 의미가 깊다. 4년마다 열려 ‘바둑 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씨배는 한국 바둑계의 발전에 ‘특이점’이 된 사건이었다.

▷응씨배는 대만 기업가 잉창치(應昌期) 씨가 1988년 40만 달러의 파격적 우승 상금을 걸고 출범시킨 세계대회. 당시 전통의 강호 일본과 신흥 강자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들러리 신세였다. 초청기사 16명 중 한국 기사는 조훈현 9단 달랑 1명이었다. 하지만 조 9단은 예상을 뒤엎고 결승에 올라 중국의 녜웨이핑 9단에 3-2로 대역전승을 거뒀다. 조 9단이 귀국할 땐 김포공항에서 서울 종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4회 대회까지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9단이 잇따라 우승했다.

▷한국은 응씨배 7, 8회 대회에선 우승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 바둑계는 중국에 밀려 침체에 빠져 있었다. 이번 우승은 한국 바둑이 신 9단을 필두로 다시 세계 바둑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됐다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미를 잘 아는 신 9단은 7월 이후 모든 일정과 생체리듬을 응씨배에 맞췄다. 인터뷰도 사양했다. 9월 열릴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의 국가대표인 그는 진천선수촌 합숙 기간 동안 다른 대표 선수들과 심도 깊게 공동연구를 했다. 체력 보강을 위한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각각 3시간인 대국 시간에 맞춰 기상과 식사 시간도 조절했다. ‘이 악물고 준비한’ 결과는 완승이었다.

▷인공지능 바둑이 등장한 뒤 인간 바둑의 인기가 시들해진 측면이 있다. 최고수가 AI인데 인간 바둑을 굳이 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100m 달리기도 자동차가 더 빠른데 인간이 0.1초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바둑도 마찬가지다. 신 9단은 “기사가 정상권에 오르면 뚜렷한 목표가 사라질 수 있는데, 인공지능으로 연구하면서 끝없이 발전하려고 한다”고 했다. 신 9단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인간 바둑을 보게 하는 묘미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