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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우포늪을 가보셨나요? 낙동강의 물안개와 소나무를 그리는 화가[전승훈의 아트로드]

입력 | 2023-08-25 12:26:00




아침 물안개가 피어나는 강변 마을. 산이 높으면 강물은 굽이굽이 흐른다. 강물에는 똑같은 산과 나무가 반영된다. 산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데칼코마니의 공간으로 하얀 새들이 날아간다. 평화로운 아침의 강변풍경이다. 산과 나무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다. 무심한 듯 풀어놓은 먹물은 자연스럽게 번져나간다.


“어릴 적 낙동강 변에 살았어요. 고향을 생각하면 늘 잔잔하게 아침 물안개가 피어나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강변 풍경이 생각납니다. 낙동강은 일직선이 아니라 굽이쳐 흐릅니다. 주변에 산이 많아서 물길이 S자 모양으로 이리저리 돌아가는 거죠. 그런 자연적인 모습이 참 좋았어요. 도시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향을 생각할 때만 떠오르는 감흥이죠.”
한국화가 김경현 작가의 물안개 피어오르는 낙동강 변 그림을 보았을 때 마음이 차분해지고, 사방이 일순간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산과 나무, 바위 같은 것을 하나하나 그려넣은 것이 아닌데도, 먹물 속이 번져가는 그림 속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와 새들이 울음 소리가 들릴 듯했다.

지난 8일부터 30일까지 경남 창녕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출향작가전 ‘고향-바라보다’ 전시회. 한국화가 김경현이 고향 창녕을 생각하며 그린 7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낙동강 하류에 있는 창녕은 국내 최대의 자연습지인 우포늪과, 억새 군락지로 유명한 화왕산(757m), 부곡온천 등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자연환경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어린 시절 낙동강변인 창녕군 남지읍 반포마을에 살았던 그에게는 어머니가 시장에 갔다가 돌아오시던 개비리길에서 바라보던 소나무와 강변의 풍경이 영원히 영감을 주는 대상이었다고 한다.

한국화가 김경현. 창녕=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낙동강을 민족의 젖줄이라고 하잖아요. 낙동강물은 산을 굽이쳐 흐르면서 반대쪽에 모래사장과 이어지는 너른 들판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비옥한 땅에 농사를 지어요. 새들도 먹이가 많아서 강변을 날아다닙니다. 강 건너 의령이 바라다보이는 풍경을 그린 겁니다.”
그의 고향에 있는 ‘남지 개비리길’은 낙동강의 절경을 감상하며 트레킹할 수 있는 길로 요즘 인기를 얻고 있다. ‘개’는 강변을 뜯하고, ‘비리’는 벼랑이란 말의 사투리다. 강변 벼랑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강을 보며 걷는 길이다.


그는 화가가 된 후 40년 동안 먹물로 소나무를 그려왔다. 그에게 소나무는 고향이자,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시장에 다녀오실 때, 밭에서 일하시다가 돌아오실 때 제는 언덕 위 소나무 밑에서 어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소나무를 보면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떠올라요. 소나무는 제 삶의 버팀목 같은 것입니다.”
그의 작품 속 소나무도 껍질이나 잎의 자세한 묘사는 생략되고, 구부러진 몸통과 줄기가 역광을 받으며 실루엣처럼 표현돼 있다. 안개처럼 흐릿한 강변의 모습이 배경으로 힘차게 서 있는 소나무는 아련한 고향의 느낌을 던져준다.

“제 기억 속에 있는 소나무의 특징적인 기둥, 가지 등 의식적인 이미지만을 잡아서 그렸습니다. 비틀어진 소나무의 몸통 모습을요. 소나무를 제대로 보려면 겨울에 솔숲에 가야 합니다. 여름에는 활엽수의 잎이 무성하고, 잡풀이 크게 자라 있어 소나무의 자태가 잘 안보이거든요. 낙엽이 다 떨어지고 난 겨울에 비로소 진면목을 보여주는 소나무를 스케치하러 갑니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화선지나 한지가 아닌 옥양목에 그림을 그렸다. 흔히 광목이라고 부르는 무명 천인데, 더욱 하얗게 표백된 천을 옥양목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먹물을 받아주는 재료로 흰색 천으로 쓴 것은, 어머니처럼 따뜻한 이불이 감싸주는 느낌이 좋아서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도시에서 자취를 할 때 흰색 광목으로 싸인 이불을 덮을 때마다 어머니가 따뜻하게 감싸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옥양목에 그림을 그리려면 우선 씨줄날줄로 면을 짤 때 먹였던 풀기를 여러번 씻어내야 합니다. 먹물로 그림을 그릴 때도 물이 적으면 거칠어서 안 받아주고, 말이 많으면 확 번져나가기 때문에 여러번 실험을 해가면서 농담(濃淡)을 표현했습니다.”




그가 창녕을 그릴 때의 또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우포늪’이다. 우포늪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국내 최대 규모의 자연내륙습지다. 둘레 7.5km에 전체 면적 231만4060m²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우포늪은 1998년 ‘람사르조약에 의한 국제보호습지’로 지정됐고, 2018년 10월에는 세계 최초 람사르 습지도시 인증을 받았다.


창녕에 늪지가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억4000만년 전이라고 한다. 공룡시대였던 중생기 백악기 당시에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고 낙동강 유역의 지반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이 일대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이 고이게 되면서 곳곳에 늪지와 자연호수가 생겨났다. 우포늪 인근에는 공룡발자국 화석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 우포늪 바닥에는 수천만 년 전부터 숱한 생명체들이 생멸을 거듭한 끝에 쌓인 부식층이 두터워서 개펄처럼 발이 푹푹 빠지지도 않는다. 억겁을 세월을 간직한 이 부식층이 있기에 우포늪은 ‘생태계의 고문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김 작가는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우포늪의 사계(四季)를 표현하기 위해 삼베, 황마 위에 돌가루와 송진, 종이를 붙여 태우는 다양한 기법을 활용했다.
그동안 흰색 천에 먹물로 그려온 수묵화와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비구상 현대미술처럼 보이는 그의 작업은 우포늪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수천가지로 변화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동요 ‘따오기’에 나오는 따오기의 주된 서식지가 우포늪이었어요. 한반도에서는 1970년대 이후 따오기가 멸종돼 사라졌는데, 2005년 중국에서 한쌍을 들여와 우포늪에서 따오기를 복원해 성공적으로 번식하고 있습니다. 우포늪은 시간날 때마다 자주 왔는데, 태고적부터의 생명의 신비를 명상하기에 좋은 공간입니다.”

전시장 중앙에 가장 큰 화폭은 우포늪의 사계를 그린 그림이다. 종이를 태워서 붙인 작업은 비슷한데, 자세히 보면 봄은 초록색, 가을은 붉은색 배경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다.
“우포늪은 여름에 가면 ‘가시연’이 보기가 좋고, 가을에는 억새와 연결돼 낭만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추운 겨울에도 살아 있는 느낌이 있고, 봄에는 생명이 피어오르고 태어나는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늪은 하나의 커다란 호수가 아닙니다. 연뿌리처럼 잘록하게 됐다가도, 꼬리가 연결돼 연꽃처럼 넓어지기도 합니다. 자연지형에 따라서 늪은 모양새가 계절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그는 늪을 표현하기 위해 누런색 황마 천위에 돌가루로 만든 석채 물감을 바르고, 송진으로 종이를 붙이고, 종이를 불에 그을리고, 태우고, 다시 붙이고, 다시 석채를 올리고, 물감을 켜켜이 쌓는 과정에서 늪의 결을 표현했다.

“종이가 태워지면서 색감도 누렇게 바뀌고, 새로운 색이 우러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켜켜이 쌓여 오래된 우포늪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색감이 물들고, 종이가 태워지면서 그림이 자연스럽게 퇴색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없어지는 것,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고풍스러움이지요. 인위적인 그림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합쳐져서 늪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찾아가려 했습니다.”


김 작가는 2013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동서미술상(26회) 등을 수상했고, 일본과 프랑스, 서울, 부산 등에서 16차례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2013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은 닭장 속 닭을 그린 작품이다. 이후 그는 ‘닭’을 그린 사계장춘, 공명도 같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닭이 새벽에 홰를 치면, 어둠이 물러가고 하늘이 밝아지잖아요. 어린 시절 시골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닭을 유심히 쳐다보게 됐습니다. 닭장 속의 닭이 어둠 속에서도 홰를 치는 것을 보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나도 닭처럼 홰를 치며 당당하게 내 의견을 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닭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장닭을 그린 동양화에는 ‘공명도(공을 세워서 이름을 떨친다)’ ‘사계장춘’(닭 그림 배경에 개나리나 매화를 그려넣어 1년 사계절 내내 봄의 따뜻함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의 의미가 담겨 있다.


보송보송한 털이 살아 있는 병아리는 옥양목 이불의 따뜻한 느낌과 비슷한 감정을 전달해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먹으로 그린 소 그림도 정감이 넘친다. 그는 “소의 ‘선한 눈망울’을 보면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가 또다른 스타일의 그림은 도자기와 막사발, 분청사기를 그린 그림이다. 실제로 도자기와 분청사기와 비슷한 석채, 돌가루 재료를 활용한 그림은 ‘소재와 재료의 물성을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에서 나온 작품이다.

김경현 작가의 분청사기 그림.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