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거스턴, 그리기, 담배피기, 먹기, 1973년. 사진: © The Estate of Philip Guston, 김민 촬영.
누군가 쓰러져 더미처럼 쌓인 듯 이 그림의 뒤편에는 구두가 한가득 장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운 얼굴이 눈만 껌뻑이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죠. 팔도 다리도 없는 이 형상의 배 위에는 케이크가 잔뜩 놓여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의 화가 필립 거스턴(1913~1980)이 1973년 그린 ‘그리기, 담배피기, 먹기’입니다. 대충 보면 귀여운 것도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섬뜩한 이 그림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
“미국 추상은 사기다”
거스턴은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1913년 캐나다에서 태어나 1919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미국에서는 흑인과 유대인을 상대로 잔혹한 테러를 자행했던 KKK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죠.러시아에서 캐나다, 미국으로 이주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거스턴의 아버지는 1923년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처음 발견한 것은 바로 10살 아들, 필립 거스턴이었습니다. 이런 차별의 비극은 추후 거스턴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필립 거스턴, Dial, 1956. 휘트니미술관 소장 사진: 김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분위기 속에서 추상 회화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예술로, 평론가들에 의해 정치적 메시지를 담지 않은 ‘순수 회화’로 여겨졌습니다. 거스턴은 이런 흐름에 반감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미국 추상 예술은 거짓이고, 사기이며, 가난한 정신의 위장에 불과하다. 그것은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느끼는 ‘날 것’의 감정. 세계에 대한 원초적이며 진실한 감정에서 도피하는 것일 뿐이다.”
필립 거스턴, The Street, 1977.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사진: 김민
탈진실의 시대를 예고하다
거스턴은 추상을 버리게 된 계기를 나중에 설명하며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1960년대가 닥치면서 나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 같았다. (베트남) 전쟁,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 세상의 잔혹함…. 집에 앉아서 잡지를 읽으며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분노하고 절망하다, 작업실에 가서 (추상화의) 빨간색을 파란색으로 바꾸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 (내 작업이) 일치하기를 바랐다.”
필립 거스턴, Web, 1975.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소장. 사진: 김민
이런 작업들이 주목받게 된 것은 추상·구상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개별 국가와 사회는 물론 개인의 다양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신표현주의’의 부상과 맞물립니다. ‘신표현주의’는 독일의 게오르그 바젤리츠, 안젤름 키퍼 또 미국의 장 미셸 바스키아가 대표적입니다.
거스턴의 회고전은 원래 2020년 예정되어 있었는데, 2년이 미뤄지게 된 사연도 서구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전 세계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 운동이 확산되었는데요.
이 때 거스턴 회고전을 준비했던 미술관들이 그림 속 KKK단 묘사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그림이 올바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때까지’ 전시를 연기한다고 발표해 예술계의 거센 반발을 모았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인간의 잔혹함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것이 거스턴의 예술인데, 미술관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이죠.
필립 거스턴, Caught, 1970. 미국 덴버미술관 소장. 사진: 김민
이런 해프닝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다양한 가치관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우리 시대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흥미롭습니다. 모두가 함께 믿었던 진실이 사라지고, 각자의 진실이 난립하는 갈등과 폭력의 탈진실(post-truth) 시대. 예민한 예술가였던 거스턴이 반세기 전부터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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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