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현지서 실전 능력 이미 입증, 스웨덴은 ‘악성 재고’ 기종 투입
한국 공군 FA-50 전투기가 8월 21일 한미연합연습 일환으로 실시된 방어제공훈련에 참여하기 위해 이륙하고 있다. [공군 제공]
기대 못 미친 저조한 그리펜 수주 실적
다재다능한 전투기로 개발됐음에도 그리펜의 덩치는 상당히 작았다. 당시 서방 세계의 표준 경량 전투기였던 F-16은 자체중량 8.5t, 최대이륙중량 19t 정도였다. 반면 그리펜은 자체중량 6.8t, 최대이륙중량 14t으로 F-16보다 한 체급 낮은 전투기로 개발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인 지난해 5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의사를 밝히기 전까지 스웨덴은 군사중립 노선을 고수했다. 유사시 자국 군사력만으로 외침을 막아야 했기에 스웨덴 군 당국은 그리펜 개발 과정에서 “스칸디나비아의 거친 자연환경에서 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그러나 돌풍은 없었다. 199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008년 태국이 소량 도입했을 뿐 그리펜은 당초 예상과 달리 이렇다 할 수출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펜 제조사 사브는 자기네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 것이라고 생각해 대량 생산 인프라를 갖추고 많은 전투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저조한 판매 실적에 상당수 그리펜이 재고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남아공과 태국은 주문한 이듬해 전투기를 인수했는데, 이 물량도 재고품이었다. 이에 사브는 1990년대 나토에 가입한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세일즈에 나섰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이 그리펜에 관심을 보였지만, 구매가 아닌 임대 형태로 스웨덴 공군의 비축 기체를 가져다 쓰는 데 그쳤다.
스웨덴 그리펜 전투기. [뉴시스]
개량형 그리펜NG, 높은 가격이 흠
사브는 수출 대박을 터뜨릴 것으로 예상된 그리펜의 실패 원인이 성능 부족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확대개량 모델인 JAS-39E/F 그리펜NG를 출시했다. 그리펜NG는 기존 그리펜 기체를 전면 재설계하고 엔진과 레이더, 항공전자장비를 일신한 4.5세대 전투기다. 최대이륙중량이 16.5t까지 증가하고 무장 장착대도 기존 8개에서 10개로 늘어났다. 불어난 덩치를 감당하고자 엔진은 미국 F/A-18E/F ‘슈퍼 호넷’용 F414로 파워업했다. 그리펜NG는 F-16에 비해 전체 중량은 가볍지만 무장 탑재량은 7.2t으로 대등한 수준이다. 능동전자주사식위상배열(AESA) 레이더와 센서융합기술, 네트워크 협동 교전 능력도 갖춰 전투 능력이 우수하다.문제는 성능을 대폭 키우느라 그리펜NG 가격도 덩달아 상승했다는 점이다. 우여곡절 끝에 체결된 2013년 브라질 전투기 공급 계약 당시 그리펜NG 가격은 36대에 54억 달러(약 7조2400억 원)였다. 아무리 사브가 현지 생산, 기술이전 등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어디까지나 경량 전투기인 그리펜NG를 대당 2000억 원에 살 나라는 많지 않다. 브라질 납품 이후 사브는 그리펜 수출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자국 방산업체의 고전에 자극받은 것일까. 스웨덴 정부는 최근 필리핀의 신형 전투기 도입 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과 영유권 분쟁으로 군사력을 확충하고 있는 필리핀의 해안경비대가 남중국해에서 훈련하고 있다. [뉴시스]
필리핀은 2014년 대당 약 340억 원에 FA-50PH 12대를 구입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남아공과 태국이 도입한 그리펜보다도 낮은 가격이었다. FA-50 시리즈는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우수한 성능도 갖춘, 최강의 가성비 전투기다. FA-50은 기계식 레이더 가운데 성능이 가장 우수한 EL/M-2032를 탑재해 100~150㎞ 거리에서 적 전투기를 탐지할 수 있다. 링크-16 데이터링크 시스템을 갖춘 덕에 육해군과 전술 정보를 실시간 공유할 수 있는 것도 강점이다. 무장 탑재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저렴한 가격과 유지비, 필리핀 공군의 작전 환경 등을 고려하면 최적의 선택이었다.
FA-50PH, 필리핀군 실전에서 대활약
실제로 필리핀은 FA-50PH를 인수한 뒤 그 성능과 신뢰성, 후속군수지원에 큰 만족감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2017년 필리핀군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이슬람국가)와 연계된 자국 내 테러조직 토벌 작전에서 FA-50PH를 이용해 큰 성과를 거뒀다. FA-50PH의 우수한 성능 덕에 테러조직 수장과 지휘부를 초정밀 폭격으로 제거한 것이다.스웨덴 정부는 지난해 12월 마닐라 주재 스웨덴대사를 앞세워 국가 차원의 방산 세일즈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올해 5월 필리핀 국방장관이 스웨덴을 방문해 그리펜 전투기 생산 라인을 둘러봤고, 6월 두 나라 사이에 상호군수지원을 위한 업무협약(MOU)이 체결됐다. 지금도 외교라인을 총동원한 스웨덴의 그리펜 세일즈는 계속되고 있다.
스웨덴이 필리핀에 제안한 모델은 최신형 그리펜NG가 아닌, 중고 그리펜을 개량한 일명 ‘그리펜 플러스’다. 사브가 보유한 잉여 기체와 스웨덴 공군에서 퇴역한 기체를 신품 수준으로 오버홀(정밀수리) 한 뒤 그리펜NG에 적용된 신기술로 업그레이드해주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필리핀 예산 범위에 맞춰 그리펜 14대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게 스웨덴의 설명이다. 최근 필리핀 측과 회동에서 스웨덴대사는 전투기 판매와 함께 정부 차원의 금융 프로그램도 제안했다고 한다. 필리핀이 필요로 할 경우 차관 또는 대출 보증 같은 지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세일즈 행보가 다급해진 것은 6월 필리핀 국방장관이 교체된 것과 무관치 않다.
변호사 출신인 길버트 테오도로 신임 필리핀 국방장관은 FA-50 전투기 도입 당시 필리핀 공군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예비역 공군대령 신분을 부여받았다. 자국 공군의 FA-50PH 도입 및 운용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FA-50 시리즈에 우호적인 인사로 알려졌다. 스웨덴으로선 자국과 관계를 형성해왔던 전임 국방장관이 생각보다 빨리 물러났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테오도로 장관 취임 직후 그동안 숨죽여 있던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필리핀에 FA-50 블록(Block) 20 판매와 기존 FA-50PH 성능 개량을 제안하고 나섰다.
FA-50 블록 20, ‘다목적 경전투기’ 활용 가능
FA-50 전투기가 8월 15일(현지 시간) 바르샤바 상공에서 폴란드 공군과 편대 비행을 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 제공]
FA-50이 그리펜을 압도하는 또 다른 소구력은 가격 경쟁력이다. FA-50 블록 20은 한국군 도입에 앞서 폴란드, 말레이시아 수출이 성사되며 ‘규모의 경제’를 확보했다. 앞서 언급한 모든 사양에 예비 부품과 무장을 합쳐도 대당 가격은 600억 원이 넘지 않을 전망이다. KAI 측은 신품 기체 12대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기존 FA-50PH 성능 개량도 가능하다고 필리핀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으로선 1조4000억 원 비용으로 고성능 4.5세대 전투기를 사실상 24대나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FA-50 블록 20의 필리핀 수출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악성 재고’ 성격의 그리펜과 달리, FA-50은 각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고성능 모델이다. 미국 공군과 해군, 해병대의 차기 전술훈련기로 대량 도입이 유력시되는 기종이기도 하다. FA-50이 필리핀 시장에서 그리펜을 물리치고 자유진영 표준 경전투기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길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04호에 실렸습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