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어릴 때 아버지가 공구와 기계를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자주 봤다. 각종 절삭기, 컴프레서(공기압축기), 그라인더(연마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쇠파이프를 자르거나 홈을 팔 때 쓰는 파이프머신이었다. 빙글빙글 칼날이 원형으로 돌아가며 파이프를 자르고 홈을 파면 참기름 짜듯 기름이 흐르고 쇠 가닥이 엿가락처럼 똬리를 틀었다.
초록색 ‘온(ON)’ 버튼만 누르면 칼날은 무심하게 돌기 시작했다. 칼날은 자신이 자르는 것이 쇠인지 손가락인지 모른다. 기계가 아버지의 손을 삼켜버리진 않을까. 칼날이 손가락을 자르진 않을까. 모골이 송연할 때가 많았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다행히 건강한 열 손가락으로 손녀들 사탕도 뜯어주고 그림도 그려준다. 곧 칠순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산업 현장의 모든 근로자가 기자의 아버지처럼 온전하게 나이를 먹진 못하고 있다. 8월 8일 SPC 계열 성남 샤니 제빵공장에서는 55세 여성 근로자가 기계에 끼였다. 이틀 뒤인 8월 10일 병원에서 숨졌다. 같은 계열 SPL 평택공장에서는 지난해 10월 15일 20대 여성 근로자가 반죽기에 끼여 사망했다. 같은 달 23일에는 샤니 성남 공장에서 손가락 절단 사고도 있었다. 올해 8월 11일 DL이앤씨(옛 대림산업) 부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는 29세 남성 근로자가 창호 작업 중 추락해 숨졌다. 이 기업 사업장에서는 지난해 1월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8월 현재까지 7건의 사고로 8명이 숨졌다.
답답한 마음에 부처 관계자들에게 물었다. 습관처럼 사람이 사망하는 기업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금이 정부가 행정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느냐고 되물었다. 수화기 넘어 한숨 뒤에 “기업 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이 들렸다.
한국이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는 벌써 28년째다. 최근 한미일 정상이 캠프 데이비드에 모이자 ‘국격이 달라졌다’는 자찬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국가에서 지난해 산업재해로 874명(산재 승인 기준)이 숨졌다. 인구 대비 산재 사망자를 계산해 보면 옆 나라 일본의 1997년 수준이다. ‘산재 후진국’의 현실이다.
샤니 사고 현장을 보고 온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기자에게 말했다. “삐, 소리만 정상적으로 났어도 피할 수 있었고 사람이 죽지 않았을 것 같다.” DL이앤씨 현장서 숨진 젊은 근로자는 생전 “돈 벌면 가족 여행을 가자”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위험한 기계에서 정상적으로 ‘삐’ 경고음이 나도록 하는 일. 근로자들이 사지 멀쩡하게 퇴근해서 가족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하는 일. 그게 선진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