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11일 서울 국방부 군검찰단 앞에서 “군검찰 수사를 거부한다”며 입장문을 발표하는 모습. 뉴시스
손효주 기자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을 놓고 논란이 일기 전까지 군의 수많은 현안을 집어삼키다시피 한 건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항명 사태였다. 그런데 이 일은 이렇게까지 커질 게 아니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상관과 부하의 생산적인 대립, 그리고 원만한 이견 조율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명령과 복종이 생명이라는 군이지만 전시가 아닌 만큼 “일하다 보면 일어나는 일”로 끝나도 될 사안이었다. 그런데 전례를 찾기 어려운 항명 파동으로 덩치를 키웠고, 군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장관의 서명에는 직위의 무게가 있는데 섣불리 서명해버린 게 아쉬운 부분이죠. 수사단장이 너무 나간 것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서명해버렸으니 그걸 뒤집으려면 수사단장을 잘 설득해서 순조롭게 진행했어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국방부 장관을 지낸 예비역 대장 A 씨의 얘기다. 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 아쉽다. 초기에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 일을 왜 이렇게까지 키운 것인가”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이 장관은 돌연 경찰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 초급 간부까지 범죄 혐의자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보고받을 때부터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이 장관은 2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도 “보고받을 때도 하천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한 여단장 등이 왜 범죄 혐의자인지 질문했다”고 했다. ‘윗선’ 외압으로 하루아침에 명확한 이유도 없이 결정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는 것.
서명한 이유는 “해병대 수사단 차원의 조사라는 점을 고려했다”고 했다. 한 번에 이해가 가진 않지만 수사단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일단 결재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그러나 찜찜하면 서명하지 않았어야 맞다. 이첩 보류가 아니라 서명을 보류한 뒤 충분한 법률 검토를 했어야 한다. 장관 서명의 무게를 생각하면 ‘예의상 서명’이나 ‘존중 차원의 서명’은 있을 수 없다. 수사단장은 보고 현장에서 이 장관이 의문을 보이면서도 정작 이첩 예정 등이 적시된 보고서를 최종 승인하는 서명은 했기에 중차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통상 부하가 보고할 때 상관이 통과의례처럼 제기하는 의문 정도로 여겼을 수 있다. 오히려 조금의 지적도 없이 “완벽하다”고 칭찬만 하는 것이 부하 입장에선 더 불안할 수 있다.
서명부터 해버린 뒤 법률상 문제 여부를 검토한 ‘선서명 후검토’의 후폭풍은 거셌다. 수사단장은 이 장관이 김계환 해병대사령관 등을 통해 명령한 이첩 보류는 정식 명령이 아니라며 보고서를 경찰에 이첩해버렸다. 이 장관과 사령관 등이 서명하며 결재한 문서상 명확한 명령이 있는데 이 외에 어떤 명령이 이를 대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수사단장은 항명 혐의로 군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누군가 항명 혐의로 수사를 받는다는 사실은 거꾸로 이 장관이나 김 사령관 등 수뇌부가 통솔력을 발휘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모두가 지는 수사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가장 안타까운 건 채 상병 순직 사건의 핵심이 항명으로 옮겨가면서 스무 살 청춘에 유명을 달리한 채 상병이 곁가지가 된 것이다. 사안이 엉뚱한 곳으로 튀면서 채 상병 순직 사건에서 정작 채 상병은 희미해졌다. 그가 순직한 지 이제 겨우 40일이 지났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