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가 무슨 말을 하다 자동차 얘기를 불쑥 꺼낸다. 그에게는 아주 낡은 차가 있다고 한다. 엔진은 괜찮지만 차대가 너무 낡아 자동차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더 이상 운행할 수가 없게 된 차다. 상식적으로는 폐차장으로 보내는 게 최선일 듯하다. 그러나 그 차가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해준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 차를 폐차시키는 것은 그 차를 배반하는 것만 같다.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그 작가는 인간이 논리와 합리, 머리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낡은 차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오래된 친구를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무슨 규칙에 따라서 그러는 게 아니지 않은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렇게 친구가 된 사람을 아무렇게나 버릴 수는 없다. 정이 든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크게 보면 마찬가지다. 우리가 입던 옷도 정이 들면 쓰레기통에 버리기가 미안해진다. 바로 이것이 윤리의 본질이다.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어떤 것. 소용이 없게 된 물건마저도 생명체처럼 여겨 버릴 수 없게 만드는 우리 안의 신비로움.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 J M 쿳시가 철학자들과 동물 윤리에 관한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하는 얘기다. 그러니 동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들이 말을 못 한다고 표현을 못 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눈과 표정을 보라. 그것이 그들의 말이요, 언어다. 말 이전의 말이요, 언어 이전의 언어다. 그러니 이성과 논리만 앞세우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