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재해-범죄 발생 시 혐한 유언비어 여전해 간토대학살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 택해야
이상훈 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총에 맞아 숨진 지난해 7월 일본 후쿠오카 한국총영사관은 안내문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우리 국민 대상 혐오범죄 가능성이 제기됐다”며 위험 지역에 접근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국내에서는 “아베 사망과 한국인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의문이, 일본에서는 “근거 없이 일본인 혐오를 조장하지 말라”는 반발이 나왔다. 안내문은 삭제됐다.
자위대 출신 일본인이 범인으로 밝혀지며 논란은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 소동은 재일동포 사회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일본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언제 어디서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당시 일본 SNS에는 “용의자 국적을 밝히라”며 재일 한국인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글이 올라왔다.
1923년 9월 1일 도쿄 등을 강타한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에 일본 군경과 민간 자경단은 식민지 백성이던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간토대학살을 나치 홀로코스트만큼 끔찍한 제노사이드(인종 말살)로까지 평가하는 시각이 역사학계에 적지 않다.
일본에서 자연재해나 심각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혐한 유언비어가 발생하는 것은 묵과하기 어렵다. 인터넷 시대라 유언비어가 퍼지는 속도만큼 사실이 밝혀지는 속도가 빠른 게 그나마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인터넷 유언비어 유포를 일본 정부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는 ‘공기(空氣)’라는 게 있다. 한번 형성된 분위기는 많은 사람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휩쓸린다. 한일 관계가 나빴던 최근 10여 년간 일본 정부와 정치권이 조성한 혐한 공기는 재일 한국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2017년 아베 전 총리 시절 일본 정부 홈페이지에서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기술한 보고서가 슬그머니 사라진 일이 대표적이다. 이를 비판하는 보도가 잇달아 보고서는 복구됐지만 이는 일본 사회에 ‘간토대학살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그해 9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는 1967년 이후 모든 도쿄도지사가 한 조선인 학살 추도사 보내기를 중단했다.
보수적이고 움직임 느린 일본 사회에서 한번 틀어진 발걸음은 웬만해서 바로잡히지 않는다. 한일 관계가 개선됐다지만 일본에서 당시 학살을 반성하자는 목소리는 일부 언론과 양심 있는 시민단체 정도 말고는 찾기 어렵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