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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 용서할 수 있지만 역사를 잊지는 않을것”

입력 | 2023-08-30 03:00:00

[간토대지진 학살 100년]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단장
“반일이 되면 피해 보는 건 동포들… 기억하고 추도하는 일본인도 많아
‘추도사 거부’ 도쿄지사 기대 안해”




“우리 동포들은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기억하고 잊지 않을 것이다.”

재일동포 대표 단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여건이 단장(75·사진)은 29일 일본 도쿄 민단 본부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이 일본에 대한 역사 인식의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밝혔다.

일본에 사는 동포에게 1923년 간토대학살은 분명히 가슴 아픈 기억이다. 하지만 일본에 생활 기반이 있기에 미움만으로 살 수는 없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동포 3세, 4세는 더 그렇다.

여 단장은 “정확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배우고 기억해야겠지만 반일(反日)이 되면 우리는 참 어렵다. 특히 정치인이 역사를 이용해 양국 관계가 나빠질 때마다 가장 피해를 보는 건 동포들”이라고 털어놨다.



● “역사를 잊어도, 역사만 고집해도 미래 없어”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지만, 역사만 고집하는 민족도 미래가 없긴 마찬가지다. 용서하되 잊지 않는 것, 그렇게 정신적으로 우위에 서면 된다.”

여 단장은 간토대학살을 언급하면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이야기를 꺼냈다. 차별당하며 비참하게 살던 흑인들을 “역사는 잊지 말되 용서하자. 용서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설득해 백인들과의 화해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만델라 전 대통령이 지금까지도 추앙받고 있다는 것이다.

100년 전 학살을 애써 축소하거나 아예 부정하는 세력도 있지만 기억하고 추도하는 일본인이 더 많다고 여 단장은 생각한다. 그는 “지진으로 10만 명 이상 죽었으니 일본인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인을 학살한 군경도 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조선인을 보호해준 경찰도 있었다. 100년 전 일본도 인간 사회였다”고 말했다.

여 단장은 “자경단 학살 피해가 컸던 사이타마현 구마가야시, 혼조시 등은 지방자치단체가 추도식을 열고 민단이 동포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다. 지금까지 유골 발굴 작업을 펴기도 한다”며 “반성하고 추도하는 일본인이 많다는 사실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 “추도사 거부 도쿄도지사에 뭘 기대하겠나”
7년 연속 조선인 희생자 추모식에 추도사를 보내지 않은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 얘기를 꺼내자 여 단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극우(極右)였다는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도 추도사를 보냈는데 말이지. 화가 나기보다 웃음밖에 안 난다. 고이케 지사는 한국학교 승인 취소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 후 이를 실행한 사람이다. 기대할 필요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는 항의하는 것도 에너지 낭비다.”

여 단장은 “(일본에서) 또 지진이 발생해 공포심이 생기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며 “역사에 눈을 감으면 안 된다”고 일본 정부에 당부했다.

간토대지진 학살 100년인 올해 민단은 주일 한국대사관, 재외동포청 후원으로 도쿄 중심가 대형 전시장 도쿄국제포럼에서 9월 1일 추도식을 개최한다. 한일 양국 유력 정치인들이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또 민단은 독립기념관과 함께 간토대지진 100년 특별기획전 ‘1923∼2023 역사의 증언자들’을 9월 1일∼11월 24일 도쿄 민단 본부 산하 재일한인 역사자료관에서 연다. 민단 측은 “생명 존중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간토대지진 100년은 현재, 미래와도 이어지는 것”이라고 개최 취지를 밝혔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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