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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멸치젓[정기범의 본 아페티]

입력 | 2023-08-30 23:33:00

안초비 샐러드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이상하리만치 선선했던 6, 7월의 파리와 달리 반갑지 않은 늦더위 손님이 찾아왔다. 이런 날에는 서울의 에어컨 바람과 얼음 생각이 간절하다. 자연을 거스르고 인위적으로 체온을 낮추는 일에 질색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 습관 때문에 파리에서는 에어컨이나 얼음이 무척 귀하다. 한겨울에도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한국인이건만, 프랑스 카페에서 콜라를 주문하며 얼음을 달라거나 아이스커피를 주문할 때 “그런 건 없다”는 식으로 퉁명스레 답하는 웨이터의 대답을 듣고 거의 절망에 빠졌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파리의 여름은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햇빛이 강한 대신 습도가 낮아 그늘 아래로 몸을 숨기면 땀이 나지 않는다. 7, 8월에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가 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프랑스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3, 4주간 바캉스를 떠난다. 여름철 파리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자들이어서 파리의 여름은 외국인 여행자들이 지킨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날 어떤 음식을 즐길까? 신선한 야채를 갈아 만든 가스파초나 미니로메인과 달걀, 참치와 올리브, 안초비(앤초비), 토마토가 들어간 식사 대용의 샐러드에 로제 와인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개인적으로 니스식 샐러드(Salade nioise)를 좋아하는데 멸치젓이 들어간 안초비의 짭짤한 맛이 더위에 지쳐 집 나간 입맛을 다시 데려오기 때문이다. 이 샐러드는 유명 화가이자 마티스의 친구인 쥘 로맹의 소설 속 주인공이 팔리콩 레스토랑에서 니스식 샐러드를 먹었다는 내용에 처음 언급되었다.

우리 멸치젓이 연상되는 안초비는 청어목 멸칫과의 바닷물고기로 주둥이가 턱 아랫부분까지 쭉 뻗어 있으며 몸체는 둥글고 날씬한 외형을 가졌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주로 샐러드, 피자, 파스타 등에 넣어 먹는 반면 그리스와 튀르키예(터키)에서는 이를 통째로 기름에 튀기거나 지져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랑스에서 안초비가 젓갈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먼저 멸치를 소금물에 절여뒀다 건져내고 내장과 같이 상하기 쉬운 부분을 제거한 다음 무거운 뚜껑을 덮어 저장소에 몇 달간 묵혔다가 자반고등어처럼 반으로 갈라 뼈를 제거하고 올리브유에 담가 완성하는 식이다. 안초비의 소비량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순인데 땀으로 빠져나간 염분을 보충하는 데 짭짤한 안초비만 한 것이 없다.

안초비를 먹는 한국인의 방식은 유럽인들과 다르다. 병에서 꺼낸 안초비를 흰쌀밥 위에 얹어 먹거나 그 밥에 물을 말아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여름만 되면 안초비를 즐겨 드시는 내 어머니의 방식은 또 조금 다르다. 젓갈이 귀한 프랑스에 살면서 체득한 그만의 제조법인데 우선 병에서 꺼낸 안초비를 가위로 자른 다음 편으로 썬 마늘과 고추, 고춧가루를 넣고 비빈 것을 냉장고에 이틀간 두었다가 먹는 식이다. 그렇게 하면 짜디짠 안초비의 맛이 중화되고 비린내 없는 깔끔한 맛의 밥도둑으로 변신한다. 매콤한 양념을 한 어머니의 멸치젓(안초비)을 몇 차례 즐기는 사이 입맛이 돌아오고 그렇게 파리의 여름이 끝난다.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