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 다른 초록색들 ‘개인의 시대’ 되며 조직 내에서 다양성이 중요 개인 잠재 역량 꺼내놓게 하는 게 리더십 요체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지난주 지방에 갈 일이 있어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달렸다. 달리는 내내 만산의 초록이 차창 가득 펼쳐졌는데 어릴 적 민둥산을 보고 자란 나로서는 새삼스러웠다. 언제 저렇게 나무들이 많아졌으며 언제 저토록 숲이 들어섰나. 뭉텅뭉텅 나무가 잘려나가 붉은 흙이 드러난 곳도 군데군데 있었으나 대체로는 나무가 가득했고 숲이 짙었다. 장석주 시인이 ‘대추 한 알’이라는 시에서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고 썼듯 저 산들이 저절로 초록이 되었을 리는 없을 것이므로 나는 초록을 보며 내내 뭉클했다.
혹시 나뭇잎들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초록은 동색이 아니었다. ‘초록은 동색’이란 말은 ‘가재는 게 편’처럼 끼리끼리 한 패가 된다는 뜻이지만 오늘은 다른 뜻으로 써보려 한다. 우리는 여름의 나무들 혹은 숲을 가리켜 초록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리곤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록은 하나의 색깔이 아니다. 노란빛을 띠는 연두부터 비가 내린 뒤의 숲처럼 짙은 초록까지 그야말로 초록색의 그러데이션이요, 향연이다. 형용사가 발달한 우리말이지만 농담과 빛깔이 다 다른 초록색들을 일일이 형용할 길이 없다.
초록이 동색이 아니고 그 안에 무수한 초록을 품고 있듯 조직 또한 그렇다. 우리는 기업이든 국가든 그저 조직이라 칭한다. 리더가 하는 일을 조직 관리라 말하기도 한다. 한데, 이렇게 말해 버리면 조직을 하나의 덩어리로 추상적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조직은 사람으로 구성되고 그이들은 다 다르다. 성별이나 세대만 다른 게 아니다. 얼굴도 기질도 생각도 취향도 능력도 다 다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조직을 이룬다. 그리고 지금 조직을 이루는 이들은 30년 전, 20년 전 조직을 구성했던 이들과 사뭇 다르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30여 년 전 우리 사회는 대놓고 여성을 차별했다. 일하는 여성을 일러 ‘사무실의 꽃’이라 했고 기껏 뽑아서는 진급이나 연봉에 차등을 두었다. 거기에 나라는 개인은 없고 그저 ‘여성이라는 열등한 부류’에 속한 자만이 있었다. 이런 게 어디 젠더뿐일까. 그러니까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실은, 사람을 성별이나 세대 등 부류에 가두지 않고 고유한 개인으로 인식하고 대하는 것이다. 이러면 구성원들도 부류를 뛰어넘어 편안하고 자유롭게 소통하고 협력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예전에 기업에서 일하며 조직의 리더를 맡았을 때 나는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장미가 제아무리 예쁘다 해도 나는 우리 크리에이티브 꽃밭에 장미뿐 아니라 다양한 꽃을 피우고 싶다고. 국화도 채송화도 해바라기도 다 심어서 우리들의 크리에이티브를 다채롭게 꽃피우고 싶다고. 맡고 있던 크리에이티브 조직이 지향할 바를 말한 것이지만 실은 조직을 이끄는 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양성을 존중받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기꺼이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주장한다. 또 그러도록 요구받는다. 이런 조직은 당연히 말이 많고 리더의 말에 금방 ‘네!’ 하고 답하지도 않는다. 일사불란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조직력이 낮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다른 개성과 생각, 역량을 가진 개인들이 조직의 목표나 미션에 공감해 각자의 방식으로 잠재력을 뿜어내므로 강력한 조직력으로 나타난다. 방식이 다른 것이다.
나는 종종 리더십을 주제로도 강연하는데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조직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이 바탕이라고. 시선을 얼굴 없는 ‘조직원’을 넘어 안쪽으로 향하면 거기, 살과 피가 도는 개인들이 있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을 더 좋아하고 잘하고 싶게 해 잠재 역량을 다 꺼내 놓게 하는 것, 그것이 조직 관리이자 리더십의 요체라고. 리더 입장에서 보면 조직 한 덩어리가 아닌 개인들 여럿을 상대해야 하므로 조직 관리의 난도가 훨씬 높아지는 셈이지만 리더를 위해 조직이 있는 게 아니니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초록은 동색이 아니니 말이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