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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만 하는 여야, 대변인부터 줄여라 [김지현의 정치언락]

입력 | 2023-09-04 14:00:00


“당에서 내는 논평 개수를 좀 줄여야 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의 A 의원은 올해 초 이재명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제안했다 합니다. “여야가 서로 비방하는 논평을 매일 쏟아내니 모든 사안이 너무 정쟁화된다”는 우려였다 합니다. A 의원은 당시 각종 ‘가짜뉴스’ 논란으로 설화를 일으키고 있던 김의겸 의원을 당 대변인에서 사퇴시키라고도 조언했다 합니다. (물론 김 의원이 물러난 건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올해 3월 김의겸 의원(당시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이 국회에서 브리핑하는 모습. 김 의원은 지난해 9월 이후 당 대변인을 맡은 이후 여러 차례 ‘가짜뉴스’ 논란에 휘말렸으며, 약 7개월 만에 교체됐다. 그는 교체 직후 페이스북에 “(대변인직을) 이제 내려놓으니 홀가분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윤석열 정부와 싸움에서 고삐를 늦추지는 않으련다.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맞서겠다”고 적었다. 뉴시스

최근 만난 A 의원은 당시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 뒤로 논평 개수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다”며 “내가 민주당에 몸담은 지가 30년이 넘었건만, 요즘처럼 논평이 많이 나오는 것은 처음 본다”고 했습니다.

국민의힘 유상범 수석대변인(왼쪽),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수석대변인이 각각 국회에서 브리핑하는 모습. 동아일보 DB



● ‘네버엔딩 말싸움’…민주당 논평 4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
정당의 ‘입’인 대변인이 내는 논평은 공당의 메시지입니다. 그만큼 정제된 표현과 전달력은 필수겠죠. 하지만 요즘 여야가 핑퐁 하듯 연일 쏟아내는 논평을 보면 확실히 ‘질보다는 양’ 싸움에 가깝습니다.

민주당부터 보겠습니다. 민주당은 올해 8월 한 달간만 무려 279건의 논평을 냈습니다. 21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를 한 달 앞두고, 하루 평균 9건씩 쏟아낸 셈입니다. 4년 전 20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 한 달 전과 비교해 봐도 논평 개수는 어마어마하게 늘었습니다. 2019년 8월 한 달간 민주당이 낸 논평은 총 116건. 이것 역시 적지 않은 숫자이지만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입니다.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그도 그럴 것이 현역 의원인 대변인 숫자가 4년 전엔 대변인(3명) 원내대변인(2명) 5명이었지만, 지금은 대변인(4명) 원내대변인(3명) 7명입니다. 여기에 청년 대변인과 원외 부대변인 등까지 합치면 규모는 더 늘어나죠.

한 민주당 관계자는 “2020년 이후 총선과 대선, 지방선거 등 대형 선거가 줄줄이 이어지면서 대변인 숫자가 자연스럽게 늘었다”며 “한 때는 정치권 내에서 아예 대변인을 폐지해 정쟁을 줄이자는 말도 있었지만, 오히려 역행하게 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선거를 치르다 보면 ‘대변인’ 스펙이 필요한 사람들, 당에서 한 자리라도 챙겨줘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당의 ‘입’이 계속 늘어났다는 겁니다.

민주당보다는 덜하지만, 국민의힘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올해 8월 국민의힘이 낸 논평은 259건. 역시 4년 전이인 2019년 8월(193건)보다 66건이 늘었습니다. 대변인 숫자도 2019년 8월 4명(청년·부대변인 제외)에서 현재 7명으로 늘었습니다.

거대 양당의 논평 개수가 급증한 배경엔 이처럼 늘어난 대변인 숫자 탓도 있겠지만,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로 꼽히는 지난 대선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입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지난 대선 기간 ‘상대방이 논평 1개를 내면 우리는 2개를 낸다’라는 암묵적인 룰이 캠프 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대선 후보가 원하는 대로 해주다 보니 서로가 경쟁적으로 논평을 내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네거티브전이 확산됐다는 거죠.


● 여야 논평 모두 ‘기승전 이재명’
민주당이 올해 8월 낸 논평을 주제별로 보면, 정치 현안은 물론이고, 외교 경제 사회 등 전 분야로 전선(戰線)을 구축한 모습입니다.

8월 18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이동관 신임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비판 논평이 31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8월 24일 방류가 시작된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이 25건으로 뒤를 이었습니다. 8월 12일 파행으로 끝이 난 새만금 잼버리 대회 관련 논평이 23건,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및 관련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한 비판 논평도 23건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논란 및 윤석열 대통령의 이념 관련 발언에 대해서도 19건의 논평이 쏟아졌습니다.

민주당은 논평으로도 ‘이재명 지키기’에 나섰더군요. 이 대표 관련 검찰 수사에 대해 ‘야당 탄압’이라고 반발하는 논평은 12건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고요? 대변인단 차원에서 낸 논평만 12건이고, 당 검찰독재정치탄압대책위원회가 별도로 8월 한 달간 낸 입장문과 기자회견문이 추가로 21건 더 있답니다.)

윤석열 정부 주요 장관과 부처도 직격했습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과 서울~양평 고속도로 논란 및 한국토지주택공사(LH) ‘순살 아파트’ 논란 등 국토부 관련 논평이 15건이었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 등 법무부와 검찰 관련 논평도 6건이었습니다. 아직 국회 인사청문회 일정도 안 잡힌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논평도 벌써 6건이나 나왔더군요.


아찔한 사람은 윤석열 대통령의 폭주를 지켜보는 국민입니다. [박성준 대변인, 8월 29일]


검찰의 이재명 대표 소환, 일본 핵 오염수 해양 투기 물타기용입니까? [강선우 대변인, 8월 24일]


‘윤석열 대통령 처가 게이트’ 그 막장의 끝은 어디입니까? [권칠승 수석대변인, 8월 19일]
국민의힘의 경우 8월 한 달간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관련 논평만 47건을 냈습니다. 전체 논평의 18%에 육박하는 수준입니다.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없었더라면 국민의힘 논평 숫자가 확 줄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법꾸라지’, ‘방구석여포’, ‘오욕의 인물’ 등 이 대표를 칭하는 표현도 다양했습니다.

이어 ‘노인 폄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김은경 혁신위원회에 대한 비판 논평이 25건이었고, 문재인 전 대통령과 청와대 인사들을 지적하는 논평도 19건이었습니다.

국민의힘 홈페이지



오직 자신만을 지키기 위한 제1야당 대표의 ‘뜬금포’ 단식 선언. 대표직에서 내려오고 하시라. [국민의힘 강민국 수석대변인, 8월 31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문재인 전 대통령, 지금은 선동으로 국민 불안을 조장하고 국론 분열을 불러일으킬 때가 아니다. [국민의힘 유상범 수석대변인 논평, 8월 25일]


자신 한 명을 위해 공당을 망가뜨리고 국회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이재명 대표는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는 ‘오욕의 인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국민의힘 장동혁 원내대변인, 8월 24일]
오랜 대변인 경력을 가진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이렇게 거대 양당이 쏟아내는 논평에 대해 “정치를 오염시키는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각자의 강성 지지층만을 겨냥한, 날 것에 가까운 수위 높은 비난 속에 정쟁은 심화되고, 중도층은 점점 정치를 외면한다는 겁니다.

‘투머치 논평’이 오히려 메시지의 힘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대변인을 지냈던 한 정치인은 “양당이 선택과 집중 없이 전 분야에 대해 날을 세우다 보니 오히려 경중과 우선순위 없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결과적으로 역효과만 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대변인 출신 인사도 “같은 당 대변인들끼리 내부 경쟁을 하느라 같은 주제로 비슷한 논평을 너무 자주 낸다. 이 탓에 오히려 이슈가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라며 “이 정도면 ‘논평 공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