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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칼럼]조소앙의 ‘홍범도 평전’으로 돌아가라

입력 | 2023-09-04 00:03:00

1933년 펴낸 ‘독립 烈士 평전’에 이례적 수록
文정부의 ‘홍범도 띄우기’는 지나쳤고
尹정부의 ‘홍범도 지우기’도 과유불급
역사의 이념화, 역사의 진영화 언제까지 반복할 건가



정용관 논설실장


‘삼균주의’ 조소앙 선생이 남긴 문집 중에 ‘유방집’이 있다. 독립운동가 82명에 대한 평전을 모은 책으로 1933년 중국 난징에서 펴냈다. ‘유방(遺芳)’은 꽃다운 이름을 후대에 남긴다는 의미다. 선생 자신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록을 남겨 놓지 않으면 자칫 잊혀질까 염려해 썼다고 한다. 일제에 분연히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거나 자결한 분들을 고루 다뤘는데, 그중에 ‘홍범도전(傳)’이 있다. 대부분 ‘죽은 열사’인데 이례적으로 생존자인 홍 장군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기개가 높았으며, 글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의협심이 강해 어려운 사람 돕는 걸 급선무로 여겨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1907년 공(公)은 북청 후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의 장교 미야베가 이끄는 중대를 섬멸하였다.” “1920년 의용단장이 되어 (봉오동 전투 때) 공이 군대에 명하여 숲속에서 발포하도록 하고 군호(軍號)를 보내니, 마침내 하늘에서 빗발치듯 총알이 쏟아졌다. 우리 군이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으니 이때 적군의 사상자는 138명이었다.”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이었지만 요즘으로 치면 국가정보원장 역할도 겸했다. 당시는 ‘밀정의 시대’였다. 정확한 정세 판단을 위한 정보 유통과 수집의 사령탑 역할까지 한 셈이다. 1921년 벌어진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 세력을 약화시킨 최악의 흑역사로 임정이 몰랐을 리 없는 사건이다. 일단 선생이 쓴 홍범도전에는 자유시 참변 얘기는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홍범도란 이름은 유방집의 ‘김좌진전’에서도 언급된다. “백야(김좌진의 호)는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범도 장군과 함께 청산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유방집 말고도 선생이 소련 타스통신 주중 특파원에게 서신을 보낸 자료가 남아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현재 정치적으로 귀국의 의사와 맞지 않아서 구금되어 있는 한국 혁명가로 하단에 기록된 인원들이 있으므로 우리 한국의 임시정부가 그들을 인수하여 우리 해방투쟁의 전선으로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57명이 적힌 ‘석방 촉구’ 명단을 첨부했는데, 홍범도가 세 번째로 적혀 있다.

선생은 ‘대한민국’ 국호를 정하는 데도 기여한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임정의 기록자였다. 선생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판단하긴 어렵지만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기초 자료임에 틀림없다. 박정희 정부가 1962년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을 때 공적 내용을 보면 ‘1907년 북청에서 일본군 1개 중대 섬멸’ ‘1920년 만주 간도에서 일병 섬멸’ 등 소앙 선생의 ‘홍범도전’에 근거했음을 알 수 있다.

홍범도를 정치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건 문재인 정부다. 문 대통령은 6·25전쟁 때 김일성 정권에서 훈장을 받은 김원봉까지 국군의 뿌리로 내세우려다 반발이 일자 그에 대체되는 상징적 인물로 홍범도 띄우기에 나섰다. 육사 내 흉상 설치, 공군 전투기 6대가 호위한 유해 봉환, 추가 서훈이 착착 진행됐다. 6·25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 문 정부에서 폄훼된 것과 대조됐다.

“봉오동 전투의 성과가 과장됐다” “공산당에 가입했다” 등의 주장과 자료가 우파 일각에서 본격 제기된 것도 그 무렵이다. 윤석열 정부가 백선엽 장군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조명하고 육사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것이 뿌리 깊은 정체성 대결, 역사전쟁의 연장선에 있음은 물론이다.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의 역할을 놓고는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해 상세히 옮기기 힘들 정도다. 레닌의 권총을 선물로 받고 말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건 사실이나 지금의 잣대로 재단하긴 어려운 국제적 시대적 상황이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분명한 건 북한 김일성 정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됐고 1943년 75세로 사망했다.

문 정부의 홍범도 띄우기는 과했다. 그렇다 해도 현 정부의 홍범도 지우기 방식도 자연스럽지 않다. 진보든 보수든 권력에 의한 역사의 이념화, 진영화는 위험하다. 홍범도 문제는 6·25전쟁 당시 북한 군가였던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멈춤의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홍 장군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더불어 일제에 무력으로 맞서 싸운 1세대, 백선엽 장군 등은 북한 공산세력에 맞서 싸운 2세대로 함께 인정할 순 없나. 소앙 선생이 혼을 담아 전하려 했던 ‘유방의 뜻’이 후대에서 갈가리 찢기고 있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