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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좀비 마약’이 파고든 도시는 먼 나라 이야기일까

입력 | 2023-09-09 01:40:00

한때 기적의 진통제였던 ‘펜타닐’… 불법 직거래로 청소년 중독 양산
야쿠자의 마약 생산지였던 한국… 최근 소비 급격히 늘어나 문제
◇펜타닐/벤 웨스트호프 지음·장정문 옮김/444쪽·2만 원·소우주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양성관 지음/368쪽·1만8000원·히포크라테스



미국 남북전쟁(1861∼1865) 당시 부상당한 군인들. 이들을 치료할 때 모르핀을 쓰면서 중독자 6만 명이 생겨났다. 히포크라테스 제공


1959년 벨기에 의사 폴 얀센(1926∼2003)은 탁월한 진통제를 개발했다. 이 진통제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암 환자를 위해 주로 사용됐다. 환자들이 큰 수술을 받을 때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마취제 역할도 했다. 한때 의료계에선 이 진통제가 ‘기적의 약물’이라 불렸다.

하지만 2021년 이 진통제 때문에 사망한 미국인은 7만 명이 넘는다. 이 진통제는 만 50세 이하 미국 성인의 사망 원인 1위다. 헤로인보다 50배, 모르핀보다 100배 강력하고 2mg만 복용해도 사망할 수 있는 이 치명적인 진통제의 별명은 ‘좀비 마약’, 이름은 펜타닐이다.

미국 탐사 전문기자 벤 웨스트호프는 저서 ‘펜타닐’에서 펜타닐이 죽음의 마약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 펜타닐 원료 생산 시설에 잠입해 취재하고, 4년에 걸쳐 160여 명을 인터뷰해 펜타닐 생산과 유통 과정을 생생하게 써냈다.

저자는 최근 미국에서 펜타닐이 급속도로 퍼진 배후로 중국과 멕시코를 지목한다. 중국 화학업체들이 펜타닐 원료인 전구체(前驅體)를 생산해 멕시코 마피아에게 수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업들은 중국 정부에서 표창을 받지만 제재는 거의 받지 않는다. 멕시코에서 제조된 펜타닐은 국제택배로 국경을 넘어 미국 전역에 퍼진다. 마약 단속에 적극적이지 않은 중국 정부와 마약으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미국 정부의 갈등은 ‘신아편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격화되고 있다.

특히 멕시코 마피아는 다크웹(접속하려면 특정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하는 웹사이트)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정부 단속을 피해 10대 청소년과의 ‘비대면 직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1913∼1994)이 1971년 “미국의 공공의 적 1위는 마약 남용”이라며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50년이 지나도록 미국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은 마약 문제가 바다 건너 이야기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양성관 의정부백병원 가정의학과장은 저서 ‘마약 하는 마음, 마약 파는 사회’에서 한국은 과거 주요 마약 생산국이었고, 최근엔 마약 주요 소비국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1970년대 부산은 일본 야쿠자들이 활약했던 ‘코리아 커넥션’의 중심지였다. 야쿠자들은 대만에서 필로폰의 원재료인 슈도에페드린과 에페드린을 수입했다. 필로폰을 제조할 때 나는 악취를 숨기기 위해 부산 근처의 악취가 심한 돼지 사육장 안에 비밀 공장을 차린 뒤 필로폰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대만에서 원료 1kg을 14만 원에 산 뒤 필로폰을 만들면 10억 원에 팔 수 있을 정도로 수익성이 높아 한국 조폭도 야쿠자를 따라 필로폰 공장을 만들었다. 1982년 일본 필로폰 시장의 88.3%를 한국산 필로폰이 차지할 정도로 한국은 마약 생산국으로 유명했다.

올해 4월 서울 강남구 학원가 일대에서 고등학생들에게 마약 성분이 담긴 음료를 속여 마시게 한 뒤 학부모를 협박해 금품을 뜯어내려던 일당이 폐쇄회로(CC)TV에 포착됐다. 동아일보DB 

양 과장은 최근 한국 마약 소비층이 20, 30대로 낮아지고 있고, 청소년 마약 중독도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엑스터시, LSD(환각제의 일종), 신종 마약 ‘야바’ 등 다양한 마약이 젊은 층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면 마약 중독자와 거래상으로 가득한 모습을 한국의 거리에서 목격하게 될지 모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