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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무나강 붉게 물들인 영웅들의 서사시… 타지마할엔 불멸의 사랑만 남아[수토기행]

입력 | 2023-09-09 01:40:00

대리석으로 치장한 타지마할. 


히말라야산맥 빙하지대에서 발원해 인도 북부 평원을 가로로 적시며 흘러가는 야무나강은 갠지스강의 최대 지류이자 인도의 신성한 7강 중 하나로 꼽힌다. 인도 수도 델리, 무굴제국의 고도(古都) 아그라 등을 옆에 끼고서 영웅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역사의 강’이기도 하다.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도, 델리의 무용담도 이 강을 따라 펼쳐진다.

● 타지마할, 지상으로 내려온 천상의 정원

붉은 사암으로 치장한 타지마할의 아치형 정문. 

아치형 출입문을 통과하니 대리석으로 만든 수로가 직선으로 펼쳐진다. 남북으로 약 280m 길이의 수로 중심에는 물이 솟아나는 인공 연못이 조성돼 있고, 수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순백의 대리석 건물이 시선을 압도해 온다. 무굴제국 황제가 숨진 아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지은 영묘(靈廟) 타지마할이다. 무굴제국의 옛 수도 아그라의 야무나강을 배경으로 삼아 세운 건축물이다.

타지마할은 1983년 ‘이슬람 예술의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07년에는 세계의 경이적인 문화유산 7개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인공으로 만든 기단 위에 67m 높이의 양파 돔과 40m 높이의 4개 첨탑, 그리고 아치형 벽감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는 영묘는 천상의 궁궐을 표현해 놓은 듯하다.

영묘는 무굴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1592∼ 1666)이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난 아내 뭄타즈 마할을 위해 세운 것이다. 그가 정복 전쟁 원정길에도 늘 함께했을 만큼 사랑했던 아내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만든 기념물이다. 타지마할은 1632년 공사를 시작해 20여 년에 걸쳐 완공됐다. 세계 곳곳의 뛰어난 건축가 및 기술자 수천 명이 투입되고 2만여 명의 인부가 동원됐다고 한다.

영묘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기 위해 수로를 따라 인공 연못으로 다가갔다. 수로 한가운데의 네모반듯한 연못은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따라 만든 ‘생명의 수원(水源)’이다. 천국 혹은 낙원에 있다는 4개의 수로(물, 젖, 꿀, 포도주)를 표현한 것으로, 자연의 풍요로움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또 이 신성한 공간을 중심으로 4개의 정사각형 구역으로 나뉜 정원은 ‘사분정원(四分庭園·차르바그)’이라고 불린다. 기하학적 모습의 정원 역시 천국을 본뜬 것이다. 이 연못에서는 타지마할의 반영(反影)을 감상할 수 있다. 물빛에 반사돼 나타나는 타지마할은 건물의 상하 및 좌우의 완벽한 대칭성과 함께 조화미를 보여준다.

더욱 신비한 것은 수로가 시작되는 지점인 출입구, 수로의 중간 지점인 인공 연못, 그리고 수로의 끝 지점인 영묘가 풍수적으로 모두 명당 혈(穴)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타지마할을 상징하는 3곳의 핵심 건축물이 각각 명당 혈에 배치돼 있을 뿐만 아니라 풍요와 생명을 상징하는 수로를 통해 한 묶음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표현이다. 이는 타지마할의 건축가가 풍수적 안목으로 건축 설계를 했음을 보여준다.

연못을 거쳐 영묘 본당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고 지하 납골당에 진짜 석관이 있다고 한다. 신성한 공간이라고 해서 덧신을 신어야 입장할 수 있고 내부 사진 촬영도 엄격히 금지돼 있다.

타지마할은 일출과 일몰, 달이 뜨는 보름 등 시간에 따라 빛깔과 자태가 변한다. 주요 자재로 쓰인 대리석이 빛을 투과시키거나 굴절시키는 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를 지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이렇게 지켰던 것이다.

샤자한 황제가 갇혔던 아그라 성 ‘포로의 탑’(오른쪽)에서 바라본 야무나 강변의 타지마할. 

하지만 황제는 그 대가를 치렀다. 황제가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빼앗았듯, 그 자신도 아들 손에 폐위되고 만다. 다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아우랑제브가 타지마할을 짓는 데 국고를 탕진했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를 아그라 성의 감옥(포로의 탑)에 유배했다. 성벽이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져 ‘붉은 성’으로 불리는 이곳의 감옥은 야무나 강변을 따라 타지마할과는 약 2km 떨어져 있다. 샤자한은 8년 동안 아내의 묘만 바라보며 살다가 숨을 거뒀다. 아들은 시신만큼은 아내 옆에 있도록 해주었다.

● 노예 왕이 세운 쿠트브미나르

이슬람의 힘을 상징하는 쿠트브미나르. 

무굴제국의 아그라처럼 인도의 수도 델리도 야무나강을 끼고 있다. 델리는 17∼19세기경 인도의 옛 수도 지역을 올드델리, 20세기 영국 식민시대에 개발된 곳을 뉴델리로 구분 짓기도 한다. 올드델리에는 ‘쿠트브미나르 유적군’이 있다. 델리에서 부침했던 영웅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델리 술탄국’을 건국한 쿠트브 아이바크(1150∼1210)이다. 이 왕조는 미천한 노예 출신이 세웠다고 해서 노예왕조(1206∼1290)로 불리기도 하는데, 향후 600년간 이어지는 북인도 이슬람 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왕조로 평가받고 있다.

쿠트브 아이바크는 종교적 열정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도자 술탄이 되기 전인 1192년 북인도 지역을 점령한 뒤 맨 먼저 ‘쿠와트 알 이슬람’(이슬람의 힘) 모스크를 건설했고, 이듬해인 1193년에는 쿠트브미나르라는 둥그런 탑을 조성했다. 이 모스크와 탑은 원래 있던 27개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 등을 무너뜨리고 지어졌다. 인도 전통 종교에 대한 이슬람의 승전을 상징하는 조치였다.

쿠트브미나르의 위용은 대단하다. 원래 이 탑은 2층 규모의 벽돌탑이었는데, 그의 후계자에 의해 3층을 더해 5층짜리 탑으로 완성됐다. 높이 73m인 이 탑은 아래 지름 14.32m, 위쪽 지름 2.75m로, 위로 갈수록 줄어드는 형태를 띠고 있다. 탑 안쪽으로는 379개의 원형 계단이 있는데 일반 관광객에게는 개방되지 않는다.

모스크인 쿠와트 알 이슬람은 다양한 종교의 양식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1205년에 완성된 이 모스크는 동서 43m, 남북 32.4m 규모의 회랑형 사각 구조다. 현재는 정면에 세웠던 석조 아치 벽과 안뜰의 회랑 등 일부만이 남았다. 회랑에 세워진 열주들은 힌두교 사원들을 파괴해 얻은 석재를 그대로 사용했기에 힌두교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스크 뜰에는 굽타 왕조 때 만들어진 철주가 눈에 띈다. 높이 7.2m에 무게 10t인 이 철기둥은 402년 찬드라굽타 2세가 비슈누 사원에 세웠던 것을 10세기경 힌두교 사원을 신축할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찬드라굽타 2세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굽타제국을 이끈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는 영웅이다. 그는 힌두교의 최고 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고, 비슈누 신전을 지으면서 이 쇠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이 철기둥은 순도가 매우 높아 1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상 부분이 녹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철주가 있는 자리는 대단한 에너지가 감돌고 있는 명당 터다. 영험한 철주로 소문나 많은 사람들이 철주를 껴안는 바람에 접근을 금지하는 철책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199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쿠트브미나르 유적군에는 이 외에도 이슬람 문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알라이 다르와자 문, 미완성 탑인 알라이 미나르, 일투트미시 왕의 무덤 등이 있다.

아그라센 키 바올리 지하 우물. 

세계 최대 힌두 사원인 스와미나라얀 악샤르담. 

한편 뉴델리에도 빼놓으면 서운한 명소들이 적지 않다. 붉은 사암 벽돌로 주변을 두르고 108개에 달하는 계단이 땅 밑으로 뻗어 있는 계단형 우물인 아그라센 키 바올리는 인도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힌두사원으로 꼽히는 스와미나라얀 악샤르담, 책에서나 보았던 인도 예술의 진품들이 진열된 인도 국립박물관 등은 눈을 풍요롭게 해준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