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해 7월 15일 사우디 리야드 왕궁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 왕세자와 환담하고 있다. [사우디 왕실 제공]
‘핵연료 사이클’ 보유 원하는 사우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 6둴 11일 우라늄 농축 장치를 살펴보고 있다. [이란 최고지도자실 제공]
사우디는 또 2040년까지 원전 16기를 건설해 원전 설비용량을 17.6GW까지 높여 전체 발전 비중의 15%를 원자력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사우디의 원전 건설 수주를 두고 한국전력공사(KEPCO)와 프랑스전력공사(EDF), 중국 국영 원전기업 중국핵공업집단공사(CNNC)가 경쟁 중이다. 사우디 정부는 일단 한전이 원전을 건설하고 미국이 운영하는 방안을 선호하고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원전 건설을 추진하면서 생산과 농축, 재처리 과정을 아우르는 이른바 핵연료 사이클을 모두 자체적으로 갖추겠다는 의도를 보여왔다. 특히 그는 미국에 우라늄 농축을 허용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이미 미국 정부에 이스라엘과 수교 전제 조건으로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확고한 안전 보장 △미국 무기에 대한 접근 △원전 건설 목적의 우라늄 농축 허용과 기술 지원 등을 제시했다.
“이란 핵무기 개발하면 사우디도 할 것”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지난해 12월 10일 리야드 왕궁에서 무함마드 사우디 왕세자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우디 왕실 제공]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은 최근 사우디 제다를 방문해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나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수교 문제를 큰 틀에서 합의했다. 당시 양국은 각각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사우디는 3가지 조건 외에도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수립에 이스라엘이 양보해줄 것을 요구했다. 반면 미국은 사우디에 경제적·군사적으로 중국과 거리를 두고, 사우디 영토에 중국 군사기지 건설을 불허하며, 화웨이 등 중국 기술 기업의 제품 사용을 제한하고, 원유 판매 대금의 위안화 결제 중단을 요구했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수교는 최대 외교 업적이자 호재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개월에서 1년 내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수교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때는 미국이 한창 대선을 치를 때다.
가장 큰 문제는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 허용 요구다. 사우디는 원전 연료를 자체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속내는 핵무기를 제조하겠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는 핵무기를 추구하지 않으나,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우리도 빨리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우디는 중국 중재로 이란과 국교를 정상화했음에도 이란의 핵 보유를 상당히 경계해왔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 시아파 맹주인 이란은 지난 2000년간 종교적으로 대립해온 말 그대로 ‘영원한 맞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란은 8월 24일 미국과 합의를 통해 자국이 억류한 미국인들을 송환하고 미국 제재로 한국 등에 동결돼 있는 자금의 인출이 가능해졌지만 아직도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이란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핵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후 대이란 제재를 복원하자 이에 맞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제한하고 우라늄 농축 농도를 60%까지 높였다. 이란은 최소 핵폭탄 2개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15년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및 독일이 이란과 체결한 핵합의를 복원하기를 원하지만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불확실하다. 이에 사우디는 이란의 핵무기 보유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자국도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핵확산금지조약 체제 붕괴 가능성
미국은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 허용 요구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자칫하면 중동 지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핵 확산 도미노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 보유를 원하는 국가들이 앞다퉈 우라늄 농축에 나설 수 있다. 이 경우 1968년 출범한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붕괴될 수도 있다.
미국의 우방 이스라엘 역시 사우디의 우라늄 농축을 반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사실상 유일한 핵보유국이다. 이스라엘이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악조건에서도 지금까지 국가를 유지해온 것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이란에 더해 사우디까지 핵을 보유하는 상황은 안보 측면에서 엄청난 리스크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난감하다는 입장을 보이자 사우디는 ‘중국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이 우라늄을 무제한 농축할 수 있게 해달라는 사우디 측 요구에 난색을 표하자 사우디가 중국 등 다른 국가들에 원전 건설을 맡기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사우디가 미국을 압박하려고 일부러 정보를 흘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우디 관리들은 “무함마드 왕세자는 미국과 대화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중국 회사로 바꿔 원전 건설을 추진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우라늄 농축을 불허할 경우 한국 원전 대신 중국 원전을 선택할 것이라는 뜻이다.
사우디가 미국과 달리 핵 확산 금지를 요구하지 않는 중국을 선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 원자력 회사는 대부분 자국 원전의 설계와 부품을 자체적으로 제작해왔기 때문에 미국이 부과할지 모를 제재 조치에서도 자유롭다. 중국은 사우디가 자국 우라늄을 채굴해 이를 농축한 후 해외 판매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중국은 이미 우라늄광에서 우라늄을 추출하기 위한 사우디의 설비 건설을 지원해왔다.
미국·이스라엘·사우디 삼각 동맹 방안
사우디는 최근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우디가 3월 원유를 달러로만 사고파는 ‘페트로 달러(Petro Dollar)’ 체제를 깨고 원유 거래를 위안화로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양국의 강화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사우디는 최대 교역국인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의 인권 문제 압박에서 벗어나는 등 그 나름 독자적인 외교 행보를 보여왔다. 게다가 사우디는 내년부터 신흥 경제 5개국 협의체인 브릭스(BRICS)에 신규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미국과 갈수록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선 사우디가 중국 원전 기업을 선택한다면 최대의 악몽이 될 수 있다. 사우디가 중국으로 기우는 또 하나의 지정학적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중동 패권을 중국에 넘겨줄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국으로선 사우디가 NPT에 가입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NPT에 가입하면 핵무기를 가질 수 없고, 보유 핵 자산에 대한 사찰을 상시로 받아야 한다. 이 경우 미국은 사우디에 우라늄 농축을 허용할 수도 있다. 미국이 추진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이스라엘, 사우디와 삼각 동맹을 통해 이란에 맞서는 강력한 안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미국이 사우디와 타협해 최상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06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