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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심 아닌데도 살해 협박… 프로야구 ‘악역’ 심판 보호해야[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3-09-11 23:36:00

‘테러’ 위협 시달리는 프로야구 심판
옳은 판정에도 가족 살해 협박까지… 정신과 진료-퇴사 상담 이어져
각 구단도 심판 안전은 나 몰라라… “정심 비난하면 야구 근간 무너져”
심판 판정 존중 문화 뿌리내려야



윤상원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왼쪽 위)이 지난달 26일 창원 경기에서 LG가 5-3으로 앞선 9회말 NC 박건우가 친 공을 피하려 하고 있다. 윤 심판은 타구가 자신의 발을 스치고 지나가자 야구 규칙에 따라 박건우에게 안타 판정을 내렸다. 이후 NC가 7-5 역전승을 거두면서 윤 심판과 그 가족은 야구팬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았다. SPOTV 프로야구 중계화면 캡처

강동웅 스포츠부 기자


11년 차 프로야구 A 심판은 지난해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당시 그가 내린 스트라이크 판정이 ‘오심 논란’에 휩싸이면서 불만을 품은 팬들이 욕설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보낸 게 시작이었다. 비시즌 기간 안정을 되찾았던 A 심판은 최근 정신건강의학과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23년 차 윤상원 심판에게 생긴 ‘정심(正審) 논란’ 때문이다.

일이 벌어진 건 지난달 26일 창원 경기였다. LG가 5-3으로 앞선 9회말 2사 1루 상황에서 NC 박건우가 2루수 앞으로 굴러가는 땅볼을 때렸다. 그대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던 타구였다. 그러나 이 공이 2루심을 맡고 있던 윤 심판 발에 맞았다. 윤 심판은 공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발바닥을 스쳐 지나갔다. 야구 규칙은 이럴 때 타자에게 안타를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윤 심판도 규정에 따라 즉시 안타 판정을 내렸다. 기사회생한 NC는 결국 7-5 역전승을 거뒀다.》



그러자 일부 LG 팬 사이에서 분노가 퍼지기 시작했다. “심판 몸에 맞았더라도 ‘정상적인 수비’가 가능했는데 심판이 ‘오버해’ 판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후 윤 심판은 물론 가족까지 살해 위협을 받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안전을 고려해 바로 다음 경기부터 윤 심판을 경기에 내보내지 않고 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윤 심판은 “아직 마음에 안정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부담된다”고 말했다.

B 심판은 “윤 심판 사건 이후로 정심을 내릴 때도 머뭇거리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규칙대로 판정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지 않을까’ 걱정돼 눈치를 보게 된다”고 털어놨다.



● 공포에 질린 심판들, 퇴사 고민 이어져
30년 경력의 최수원 KBO 심판팀장은 1997년 자신이 주심을 맡았던 경기를 잊지 못한다. 이날 패한 안방 구단 팬들이 “심판 ×× 얼굴 좀 보자”며 경기장 출입구에서 최 심판을 기다렸다. 다음 날 경기 일정에 맞추려면 서둘러 이동해야 했지만 최 팀장은 심판실에 숨어 있다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경기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막내급인 C 심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뒤에도 외출할 때 마스크를 절대 잊지 않는다. 스트라이크 판정으로 논란이 생긴 뒤 인터넷에 그의 신상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C 심판은 이 경기 다음 날 출근길에 마주친 팬들에게 위협을 받고는 경기장 안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그는 “예전에 롯데가 연패에 빠졌을 때 팬들이 경기장에서 나오는 이대호(은퇴)를 향해 치킨 박스를 던진 적이 있지 않나. 이제는 퇴근하는 심판들에게 칼이 날아올 수 있다는 걱정이 든다”며 “최근 프로야구 관중이 600만 명을 넘어섰다며 축포를 터뜨렸는데 심판 입장에서는 솔직히 ‘우리에게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다”고 말했다.

결혼 6년 차인 D 심판은 “아이를 엄청나게 좋아하지만 매일 출장을 다니다 보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윤 심판 사태 이후에는 아이를 갖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라며 “조카들에게도 ‘삼촌이 야구 심판이라는 건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고 말했다.

연차가 어린 심판 사이에서는 퇴사 고민도 늘고 있다. E 심판은 “야구장에 출근하다 보면 나만 빼고 세상 사람 모두가 행복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빨리 알아보면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지 않겠나. 심판이 평생 할 직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 존중받지 못하는 심판, 불신하는 선수들

선수단도 심판을 잘 믿지 않는다. 비디오판독 요청 건수가 최근 3년 사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게 증거다. 2021년에는 768건, 지난해에는 856건이던 요청 건수는 올해는 11일 현재 벌써 825건을 기록했다. 정규시즌이 끝날 때면 995건의 요청 건수가 기록될 추세다. 반면 비디오판독을 통해 판정을 뒤집은 비율은 27.5%에서 25.5%로 갈수록 줄고 있다. 번복률이 46%가 넘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나 32% 수준인 일본프로야구와 비교하면 한국 심판들이 더 정확하게 판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심판의 판정을 존중하는 분위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KBO 관계자는 “2008년 프로야구 전 경기 TV 중계가 시작됐고 이후 비디오판독 신청 범위도 점차 확대돼 왔다. 그러면서 ‘내가 본 게 맞고, 심판이 틀렸다’는 생각이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F 심판은 “TV 중계에 나오는 스트라이크존이 반드시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리면 (TV 중계를 보고 있는) 전력분석원 쪽을 바라보면서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라면서 “그건 본인도 100% 확신하지 못한다는 뜻 아닌가. 그러면서도 심판 판정은 일단 안 믿겠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G 심판은 “KBO 심판 누구에게든 ‘심판의 권위가 존중받는 것 같냐’고 물어보면 ‘우리에게 권위 따위가 어디 있느냐’는 답이 돌아올 것이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선수들도 심판에게 마음대로 소리를 지르는 게 현실”이라며 “연차가 낮은 심판만 골라서 대드는 선수도 있다”고 털어놨다.

판정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면서 올 시즌부터 심판진은 설명이 필요한 순간에는 마이크를 들고 자신이 판정을 내린 근거를 설명하고 있다. 윤 심판 역시 본인이 공에 맞은 뒤 바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래도 ‘성난 민심’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 ‘악당’이 있어야 프로야구도 있다
KBO 규약 제136조는 ‘리그 경기 중 안방 구단은 심판에 대한 충분한 안전을 보장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심판들의 출퇴근길에 실제로 경호 인력을 배치하는 구단은 없다. B 심판은 “선수들 출퇴근길은 철저히 보호해주는 안방 구단이 심판은 ‘나 몰라라’ 방치하는 게 현실”이라며 “주차장에 내려 경기장에 들어설 때까지 경호원 한 명이라도 붙여주면 불안이 줄어들 것 같다”고 말했다.

심판 임무를 수행하며 얻은 육체적·심리적 질병에 대해서는 KBO에서 치료를 도와줄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A 심판은 “정신과 병원에 가게 된 건 심판 일을 하다 얻은 마음의 병 때문인데 치료 비용은 직접 부담하고 있다”며 “심판도 KBO 소속 직원인 만큼 ‘회사’에서 이런 문제를 ‘산업재해’로 인식하고 도움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성우 SPOTV 해설위원은 “‘포청천’이 제 역할을 하려면 확고한 주관을 갖고 주변의 반응에 흔들려선 안 되는데 지금은 지나친 비난과 신변 위협 등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심판들이 이처럼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면 KBO와 각 구단에서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백하게 편이 나뉘는 스포츠 세계에서 심판은 어떤 판정을 내리더라도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야구 기자 레너드 코펫(1923∼2003)은 저서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심판을 다룬 챕터를 “자, 이제 ‘악당’을 등장시킬 차례다”라고 시작하기도 했다.

중요한 건 악당 없이는 슈퍼 히어로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기 눈으로 본 판단이 옳고, 응원 팀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 심판이 악당처럼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자의적 판단으로 ‘조커’를 심판하고 나면 ‘배트맨 시리즈’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팬들이 사랑하는 야구를 계속 보고 싶다면 심판들에 대한 존중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 봐야 한다.



강동웅 스포츠부 기자 lep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