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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정은]원수에서 핵심 파트너로… 손잡은 美-베트남

입력 | 2023-09-11 23:51:00


“고통스러운 (과거의)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지난 수십 년간 애를 써왔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베트남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진행한 지난주 브리핑에서 베트남전의 상흔 치유와 화해 노력을 강조했다. 베트남전 영웅이었던 고(故) 존 매케인 전 공화당 상원의원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우정도 거론했다. 같은 날 백악관에서는 참전용사 래리 테일러 예비역 대위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열렸다.

▷미국과 베트남이 10일 하노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외교관계를 최상위 단계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높였다. 10년 전 맺은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한꺼번에 두 단계를 높인 파격적 격상이다. 베트남은 미군 철수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을 초청했고, 미국은 대규모 투자와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지원 방안이 담긴 선물 보따리를 풀며 화답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미국의 금수 조치에 묶여 있던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에 애플과 인텔, 보잉 같은 기업들이 몰려가는 격세지감의 변화다.

▷양국 밀착의 공통분모는 중국이다.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을 규합하며 대중 전선 구축에 공을 들여온 미국은 베트남을 그 마지막 고리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대미 수출 규모가 146조 원에 달하는 베트남은 탈중국에 나선 미국 기업들의 제조 시설을 옮길 매력적인 대안 국가이기도 하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중국과 날을 세우고 있는 베트남으로서도 미국과 손잡을 이유는 충분하다. 중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해상경계선인 구단선(九段線)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바비’를 비롯한 영화들과 넷플릭스 드라마 상영을 금지한 나라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이 미국 편에 완전히 붙어버릴 것으로 예상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 악화 속에서도 팜민찐 총리가 6월 베이징을 찾아 리창 총리와 회담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이 확정된 이후에는 베트남이 가장 먼저 정상 간 축하 전화를 했다. 그런가 하면 냉전 시대의 맹방이었던 러시아와는 무기 거래를 지속하고 있다. “단단한 뿌리 위에서 유연하게 가지가 휘는” 대나무처럼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이른바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베트남 당국자들은 말한다.

▷전쟁에서 총을 겨누던 적이 친구가 되고, 실리 앞에서는 숭고한 이념도 한순간에 팽개치는 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한때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불렀던 미국과 베트남이 손을 맞잡으며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순간의 핵심 파트너”라고 강조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어디 이 두 나라뿐일까. 국익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그 어느 국가도 예외가 없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