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통곡의 땅’ 르포 강진 덮친 마라케시엔 먼지 가득 산사태로 고립된 산악지대 마을 “도움 절실한데 정부-구조대 없어”
가족 잃은 슬픔 규모 6.8 강진이 발생한 모로코 중부 마라케시 물라이브라힘 마을에서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여성을 이웃들이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다. 아틀라스산맥 고원지대에 있는 이 마을은 지진 진앙과 가까운 데다 내진 설계가 안 된 건물이 대부분이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끊겨 구조대와 중장비 접근이 어려워 생존자 수색과 구조가 난항인 가운데 주민들은 맨손으로 건물 잔해에서 사망자들을 끄집어내 장례를 치르고 있다. 마라케시=AP 뉴시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이날 기준 2497명이 숨진 가운데 생존자를 구할 수 있는 72시간의 골든타임이 끝나가지만 구조의 손길은 거의 닿지 않고 있다. 피해가 집중된 아미즈미즈 등 산간 지역 주민들은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고 있다”면서 지원을 호소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0일 보도했다. 아틀라스의 한 산간 마을에선 남성 5명이 흙더미와 벽돌만 남은 집터에서 잔해에 깔린 가족을 찾기 위해 곡괭이로 땅을 파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남성들은 2개뿐인 곡괭이를 돌려 쓰며 거대한 흙더미를 파헤쳤다”고 전했다.
맨손으로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끌어내던 압델자릴 람그라리 씨(33)는 “누군가가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NYT에 말했다. 주민 압데사마드 아이트 이히아(17)는 “우리에겐 도움이 너무 필요한데 정부나 구호요원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1일(현지 시간)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무너진 건물 벽돌 및 잔해 복구 작업 중인 인부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8일 발생한 지진은 험준한 산악 마을을 집중 강타해 구조대의 접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진 잔해와 낙석으로 도로까지 끊겨 헬기를 동원해야 하는 실정이다.
지진 발생 직후 프랑스, 미국, 이스라엘, 대만, 알제리 등 여러 국가가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모로코 정부는 “구조 작업에 혼선이 생길 수 있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 우호국인 스페인, 카타르, 영국, 아랍에미리트(UAE) 등 4개국의 지원 제안만 받아들인 상태다.
해외 정부와 민간단체들이 “구조대를 당장 파견할 준비가 돼 있다”며 나서도 모로코 당국은 “아직 국왕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입장을 반복하며 골든타임을 허비하고 있다.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통치가 유지되는 모로코는 국왕이 국정을 지휘한다. 국가 위기 시 국왕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지만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6세는 8일 밤 지진이 났을 때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그는 지진 발생 12시간 뒤에야 “군대에 구조를 지시했다”는 짤막한 성명만 발표하는 등 늑장 대응했다.
40시간 지나도 구조대 안와… 구급차 없어 오토바이로 환자 이송
[모로코 120년만의 강진]
“구조 혼선 우려” 4개국 지원만 승인
사상자 현황 등 정보 공개도 미적
‘철권 국왕’ 탓 정부 역할 소극적
“구조 혼선 우려” 4개국 지원만 승인
사상자 현황 등 정보 공개도 미적
‘철권 국왕’ 탓 정부 역할 소극적
11일(현지 시간) 기자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모로코 마라케시 내 구도심 메디나를 둘러보니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주민들은 건물들을 보며 “내 삶의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고 한탄했다. 8일 발생한 모로코 강진에 따른 인명 피해는 11일 기준 사망 2497명, 부상 2476명으로 집계됐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구급차가 없어 부상자들도 자가용이나 오토바이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구조대를 기다리다 지친 주민들은 한 모로코 군인을 향해 “대혼돈에 빠졌다”며 따지기도 했다. 가족들과 거리로 대피해 이불을 깔고 있던 물라이 알리 아주아드 씨는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받은 도움은 외국 친척이 보내준 돈뿐”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 지진 48시간 뒤에야…정부 늑장 브리핑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모로코 북부 해안도시인 카사블랑카나 진앙에서 600∼700km 떨어진 북부 도시 페스 등에서도 시민들이 구호품과 의료품을 실은 차를 몰고 마라케시 및 산간 지대로 나서고 있다. 11일 동료 20여 명과 피해 지역 위르간으로 향한 압델아지즈 씨는 기자에게 “피해 지역에 베이스캠프를 꾸리고 2주 이상 머물며 구조에 동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모로코 정부의 늑장 대응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정부의 첫 공식 브리핑은 지진 발생 약 48시간 만인 10일 밤에야 이뤄졌다. 구조 활동이나 사상자 현황 등 기본적인 정보 공개도 제때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철권 국왕’ 제도가 구조 시스템 방해
10일(현지 시간) 모로코 중부 마라케시 물라이브라힘 마을에서 주민들이 8일 심야에 발생한 규모 6.8 강진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사이를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모로코가 국가적 자존심과 국왕의 대외 이미지를 위해 해외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인도주의 단체 ‘기아대책행동’에서 일했던 실비 브뤼넬 프랑스 소르본대 교수(지리학)는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모로코는 아프리카의 신흥국으로서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자체 구조 역량을 갖췄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 주려 한다”고 말했다.
모로코에선 국왕 비판은 범죄로 규정돼 있어 대정부 규탄 여론도 형성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주민 5명 중 1명꼴로 사망자가 발생한 아미즈미즈 지역의 한 주민은 9일 “정부를 비판하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가만히 있다가 이번 지진이 없었던 일이 될까봐 두렵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마라케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