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2년, 즉 1412년 5월이었다. 의정부에서는 한 편의 시 때문에 난리가 났다. 그것은 새로 시작한 조선 왕조에 대한 부러움 섞인 찬사에서 시작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안타까운 애도로 끝나는 시였다. “천년의 새 도읍이 한강 저편에 있어/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밝은 임금을 보좌하누나/삼국을 통일한 공은 어디 있는가/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고려의 관리였던 서견(徐甄)이 쓴 시였다. 신하들은 그것을 불순한 시라고 생각하고 태종에게 서견을 잡아들여 추궁하라고 했다.
그러나 태종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고려의 신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려 왕조를 애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 왕조도 언젠가 같은 운명에 처할지 모른다며 서견이 보여준 지조와 충성심은 본받아야 할 것이지 처벌할 대상이 아니니 더 이상 따지지 말라고 했다. “우리 이씨가 어찌 천지와 함께 무궁할 수 있겠는가. 이씨의 신하 중에 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는데 어찌 고려 왕조에 대한 향수를 토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태종이 아무리 다독여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그렇게 “따지고 싶다면 백이(伯夷)의 도리가 잘못이라고 한 후에” 따지라고 했다.
백이가 누구인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동생인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은 은나라 왕자다. 백이와 숙제는 지조와 정절의 대명사였다. 그들은 유가의 선비들에게 칭송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고려 왕조를 애도하는 시를 지은 서견도 백이와 숙제처럼 칭송의 대상이어야 했다. 신하들은 그러한 논리 앞에서 할 말을 잃고 왕의 뜻에 따랐다. 너그러움이 편협함에 승리를 거두고 서견을 구했다. ‘태종실록’은 6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너그러움이 얼마나 소중한 덕목인지를 생생하게 환기한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