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백지신탁 불복 논란
● 공익과 사익의 이해충돌 방지 위해 도입
주식 백지신탁은 고위 공직자가 보유한 주식으로 인해 그가 담당하는 직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식을 매각하거나 처분·관리를 제3자에게 맡기도록 한 제도다. 1978년 미국에서 ‘블라인드 트러스트(Blind Trust)’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도입됐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는 미국 캐나다 영국 등 8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백지신탁 대상자는 국회의원과 장차관을 포함한 1급 이상 고위 공직자와 기획재정부의 금융 관련 부서와 금융위원회의 4급 이상 공직자다. 본인과 배우자, 직계존비속이 보유 중인 3000만 원 초과 주식을 임명일로부터 두 달 이내에 직접 매각하거나 수탁기관(금융회사)에 백지신탁해야 한다. 수탁기관은 신탁계약이 체결된 날부터 60일 이내에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 다만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로부터 보유 주식과 직무 사이에 관련성이 없다는 판단을 받을 경우 주식을 계속 보유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공직자가 직무 수행을 통해 사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막아 공직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과도한 재산권 침해라는 일부 공직자들의 반발도 계속됐다. 유 사무총장은 “간접적으로도 (배우자가 지분을 가진 회사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 사무총장의 배우자는 바이오 회사의 주식 8억2000만 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박 실장도 “(이해충돌이라는) 추상적 위험을 이유로 배우자의 인격권과 자기계발권, 가업승계권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 박 실장의 배우자는 서희건설 회장의 장녀다.
하지만 12일 서울행정법원은 유 사무총장이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직무 관련성 인정결정처분 취소 소송에서 “청구를 기각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배우자가 주식을 보유한 기업은 선택적 회계감사 기업이고 사무총장의 업무 범위에 비추어 볼 때 이해충돌 가능성이나 위헌성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헌법재판소도 이미 2012년 백지신탁 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재는 신탁 대상을 ‘3000만 원 이상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으로 제한해 목적 달성에 필요한 범위 내로 최소화했고, 이 제도에 따른 사익의 침해가 그로 인해 확보되는 공익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 허술한 심사에 시간 끌기… 유명무실 우려도
임명 후 두 달 내에 매각 또는 백지신탁을 마쳐야 하지만 백지신탁심사위의 직무 관련성 판단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백지신탁을 했더라도 ‘60일 이내에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는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기한 내 처분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30일 연장이 가능하고, 연장 횟수에는 제한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비상장 주식은 매각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길게는 몇 년 동안 팔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박 실장과 유 사무총장처럼 결정에 불복하며 시간 끌기를 시도해도 마땅히 막을 방법이 없다. 백지신탁심사위는 지난해 12월 박 실장에게 주식을 백지신탁하라고 통보했지만 박 실장은 올해 2월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행정심판에서 기각되자 다시 지난달 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유 사무총장도 지난해 10월 백지신탁심사위의 결정에 불복해 지난해 12월 행정소송을 냈다. 12일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할 경우 최종 결정은 더 미뤄질 수 있다. 지난해 6월 임명된 두 사람이 사실상 주식을 보유한 채 임기를 채울 수도 있는 셈이다.
이 밖에 해외주식과 가상자산 등이 백지신탁 대상에서 빠져 있는 것도 문제다. 공직자 중에 유독 ‘서학개미’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외주식이라도 직무 관련성이 있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가령 구글, 애플 등 빅테크 주식을 다량 보유한 의원이 빅테크에 유리한 입법을 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투자 환경의 변화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어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美, 공직자 주식거래 금지까지 추진
일각에선 주식 백지신탁 제도가 기업인 등 유능한 인재의 공직 진입을 막는 부작용이 있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정부의 첫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는 주식 백지신탁 문제로 사흘 만에 직을 포기했다. 문재인 정부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성공한 벤처기업인을 임명하려 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특히 창업자가 많은 신산업 관련 민간 전문가를 영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정부가 우주항공청의 인재 영입을 위해 특별법에서 백지신탁 적용의 예외를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보유 주식을 신탁하되 매각하지 않고 퇴임 후 다시 돌려받는 보관신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예외를 두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이견도 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인의 공직 진출이 백지신탁 제도를 후퇴시킬 정도의 의미와 비중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보관신탁 제도는 재직 기간에 자신의 보유 주식 내지 관련 기업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오히려 미국에선 공직자들의 주식 보유와 거래를 더 엄격히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주식 거래 내역을 45일 이내에 온라인에 공개하도록 한 ‘스톡법(STOCK Act)’에서 더 나아가 주식 거래 자체를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미 상원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이 초당적으로 ‘공무원 주식 거래 금지법’을 7월 발의했다. 법안에 따르면 행정부 및 입법부 공무원은 물론 의원의 배우자와 자녀까지도 개별 주식 종목 거래를 금지한다. 위반한 경우 주식거래 이익을 몰수하고, 최대 1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한다.
도입된 지 18년이 된 주식 백지신탁 제도를 현실에 맞게 보완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히 있다. 직무 관련성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부터 마련해야 한다. 백지신탁심사위의 결정에 대한 불복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과제다. 재산권 침해 논란을 차단하면서 협소한 인재 풀도 넓힐 수 있는 합리적 해법도 필요하다. 백지신탁의 취지는 주식을 많이 가지면 무조건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절대 방해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