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지진 발생 다음 날인 9일(현지 시간) 마라케시 외곽 마을에서 한 남성이 지진으로 숨진 형제를 매장한 후 흐느끼고 있다. 마라케시=AP 뉴시스
신광영 국제부 차장
모로코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다. ‘어떤 공무원도 국왕보다 앞설 수 없다’는 원칙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620여 명이 숨졌던 2004년 지진 때도 모로코 총리는 왕이 먼저 현장에 갈 때까지 기다리느라 사고 한참 뒤에야 피해 지역을 방문했다. 이번 지진 때도 국제사회가 구조대 파견을 제안하고 나섰지만 모로코 정부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다. 그나마 구조대를 받기로 한 4개국인 스페인 영국 카타르 아랍에미리트는 모두 왕실이 있는 나라다.
왕실 통치가 참사 대응에 얼마나 취약한지 이번 지진으로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지만 모로코에서 왕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왕이나 정부를 비판하면 처벌할 수 있는 왕실모독죄가 공고히 유지되고 있어 국민들의 숨통을 쥐고 있다. 모로코가 2004년 큰 지진을 겪고도 재난 대비 시스템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배경에는 권력에 대한 심판과 검증을 할 수 없는 구조 탓도 클 것이다.
올 2월 5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도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 재난이 닥쳤을 때 국민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70여 개 국가에서 구조대를 지원받았던 튀르키예와 달리 시리아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루트가 차단됐다.
자국민을 독가스 등으로 학살해 ‘시리아의 도살자’로 불리는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 이후 북서부 반군을 압박하기 위해 외부 구호단체가 오갈 수 있는 국경을 한 곳만 남기고 모두 폐쇄했다. 그런데 지진으로 이 국경 도로가 파괴되자 해외 구조대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히게 된 것이다. 시리아는 오랜 내전으로 자체 구조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고 의료진마저 대부분 해외로 떠난 상태였다. 독재 치하에 있는 폐쇄 국가의 치명적 약점은 재난 속에서 더욱 여실히 드러나고 국민들이 그 대가를 치른다.
민주주의는 일상에선 피부에 와닿지 않는 모호한 관념이지만 국민의 생명이 위태로운 참사가 벌어지면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로 그럴 때 ‘정부는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는 치열하게 묻게 된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박근혜 정부 붕괴의 시작점이 됐고, 지난해 이태원 압사 참사가 윤석열 정부의 중대한 위기로 번질 뻔했던 것도 사고 현장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생생히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재난에 대비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점검하고 상황이 벌어지면 정권의 명운을 걸고 대응에 나서게 된다. 민주주의의 미덕은 집권 세력이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국민의 생명을 중시하게 만드는 데 있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