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단식 YS 4일째부터 극심한 고통 이재명은 신뢰성 도덕성 진정성도 의심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 빠르면 21일 ‘민주주의 사수’하려면 계속해야 할 판
단식 14일째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 대표실에 누워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야당 대표 김대중(DJ) 평민당 총재의 단식장에 여당 대표인 김영삼(YS)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이 찾아온 건 단식 4일째였다. 1990년 10월 DJ는 ‘3당 합당 비밀각서’에서 드러난 내각제의 포기,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주장하며 당사 총재실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터였다.
징하고도 질긴 정적(政敵)관계임에도 DJ가 “단식은 선배니까 경험담을 좀 들려 달라”고 하자 YS가 “내 경험으로는 4일에서 10일 사이가 제일 고통스럽고 매 시간 배가 아파오더라”고 말해준 과거사는 지금 돌아보면 낭만적이다. 무도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 YS가 ‘정치활동 규제 전면 해금, 구속 인사 전원 석방’ 등을 내걸고 23일간 목숨 건 단식투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의외로 덜 알려진 것은 단식의 고통이다.
아무리 죽을 각오라 해도 단식을 하려면 식사도 줄이고 숙변도 없앤 뒤 시작해야 한다. 당시 56세였던 YS는 1983년 5월 18일 비장하게, 그러나 무모하게 단행했다. 그래서 잔변이 창자벽에 말라붙으면서 온몸을 데굴데굴 구를 만큼 극심한 복통으로 고생했던 거다.
1990년 당시 66세였던 DJ는 단식 닷새가 지나자 화장실까지 4m 거리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래도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신 치하도, 5공 폭력체제도 아니고 언론과 집회의 자유도 상당 수준 누리는 상황에서 야당 총재는 보다 효율적이고 긍정적인 정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고 동아일보 사설은 지적했다.
단식 8일째 DJ는 의사의 위험경고에 병원으로 실려 갔다. 10일째 되는 날 여당 총무로부터 ‘대통령의 해결 의사’를 전달받고, 13일 만에 단식을 풀면서 DJ는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단식의 결실인 1991년 6월 시도의원 선거는 야권 참패였다. DJ가 “노태우 정권 3년 중간평가”라고 유세했음에도 국민은 투쟁보다 안정과 성장을 선택했던 것이다.
과거 두 대통령의 본을 받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무기한 단식’을 시작한 지 오늘로 15일째다. 당 대표 취임 1주년인 지난달 31일 그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민주주의 파괴에 대한 사과, 일본 핵 오염수 방류 반대 천명, 국정쇄신과 개각을 요구하며 출퇴근 단식에 들어갔다.
이런 요구 조건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개딸 중에서도 거의 없다. 윤 대통령 아니라 하늘에 있는 두 대통령도 들어주기 힘든 조건이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대표가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시작한 단식”이라며 “중간에 그만둘 생각이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재명도 속으론 언제까지 계속하란 소리인가 싶어 그가 미울 듯하다. 어떤 대통령이 야당 대표에게 그런 사과를 할 것이며, 중국 빼고 반대하지 않는 오염수 방류 반대를 뒤늦게 하겠는가 말이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은 13일 국방, 문화체육부, 여성가족부 장관을 교체했다. 개각 요구가 진심이었다면 이재명은 이제라도 단식을 푸는 게 맞다.
검찰이 최대한 빨리 영장을 청구하면 21일 또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25일이면 단식 26일째, 이때까지는 당사에서든, 병원에서든 이재명은 곡기를 끊고 있어야 할 것이다. 단식하며 드러누운 당 대표를 잡아가도록 찬성표 던질 의원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직 물러나라”는 주장도 쑥 들어갔다. 단식 문안인사가 총선 공천 눈도장 찍기라는 소문도 나돈다. 그 점에서 이재명의 단식 정치는 성공했다. 나라 전체와 개딸 아닌 국민으로선 불행이다. 대선 패장에 휘둘려 1년 반이 허무하게 갔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