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네이버스 ‘더네이버스 레거시 클럽’ 국내 자립준비청년 미래 돕고, 아프리카에 식수 시설 건립 등 유산 기부자 원하는 곳에 공익 사업 “소액이라도 뜻깊게 쓰일 수 있어”
지난해 유산 2000만 원을 자립준비청년 지원을 위해 기부한 고 오상운 씨(왼쪽)와 아내 장연희 씨. 장 씨는 “남편은 생전 가정 형편이 어려워 꿈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애썼다”며 기부 이유를 밝혔다. 굿네이버스 제공
“떠난 이를 기리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남편의 흔적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산 기부를 선택했어요.”
준비 없이 맞닥뜨린 이별이었다. 잔병치레 한 번 없던 남편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린 건 지난해 여름. 평소 건강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확진 판정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집에서 쓰러졌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장연희 씨(37)는 그렇게 허망하게 동갑내기 남편 오상운 씨를 떠나보내야 했다.
슬픔을 추스르고 남편의 삶을 정리하던 장 씨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국내에서도 유산 기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장 씨는 지난해 11월 글로벌 아동 권리 전문 비정부기구(NGO) 굿네이버스를 통해 남편의 유산 중 2000만 원을 기부했다.
● 어머니의 유산이 아프리카 ‘생명수’로
매년 9월 13일은 유산 기부의 날이다. ‘유산 기부’란 사후에 남겨진 재산을 공익적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공익단체에 전달하는 것을 뜻한다. 기부를 원하는 사람이 생전에 유산 기부를 약정하거나, 사후에 유가족이 고인의 뜻을 기려 기부를 결정할 수 있다.
굿네이버스는 유산 기부를 했거나, 하기로 한 회원들을 ‘더네이버스 레거시(legacy·유산) 클럽’에 등재해 예우하고 있다. 법률, 세무, 신탁 등 전문가를 통해 기부자 개인별로 증여 방법을 설계해 주고, 기부자의 이름은 특별회원 예우 공간에 새겨진다.
2017년 작고한 김생섭 할머니도 더네이버스 레거시 클럽 회원이다. 아들 김봉호 씨가 지난해 4월 어머니를 추모하며 마을 이장으로 받은 봉급 450만 원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아들 김 씨는 어머니 명의로 매월 3만 원씩 후원도 이어 오고 있다.
김 할머니 모자가 낸 기부금은 에티오피아 케베나 지역의 학교에 식수 시설과 화장실을 설치하는 데 사용됐다. 아들 김 씨는 “(어머니 생전에) 여행 한 번 보내드리지 못했고, 맛있는 음식 하나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었다”며 “평생 자식과 이웃을 위해 사셨던 어머니를 빛낼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 국민 26% “유산 기부 의향 있어”
이렇듯 유산 기부 사례가 활발하지 않은 데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상속 제도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부자가 생전에 유산 기부 의사를 밝혔더라도, 사후 유가족들이 유류분 반환 소송 등 상속 분쟁을 벌이면서 고인의 뜻대로 기부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유산 기부에 대한 세제 혜택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자선단체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과반(51.6%)은 상속세 감면 등의 혜택이 주어질 경우 유산을 기부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영국의 경우 유산의 10% 이상을 기부할 경우 상속세를 40%에서 36%로 감면해주고 있다.
● 신탁, 보험으로도 유산 기부 가능
유산 기부를 약정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유언 공증이다. 기부자가 증인 2명과 유언집행인 1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증인(변호사) 앞에서 유언을 말하고, 공증인과 증인이 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방법이 너무 까다롭다면 유언 대용 신탁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기부자가 금융회사와 자산신탁계약을 맺고 자산관리를 위탁하면서 사후 자신의 재산 중 원하는 금액을 기부 단체에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현대중 굿네이버스 대외협력부장은 “유산 기부는 대규모 자산가가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소액이라도 얼마든지 기부해 뜻깊게 쓰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유산을 어떻게 분배할지 가족들과 먼저 충분히 상의하고, 남은 재산 일부를 후원하면 가족 간에 분쟁의 소지도 줄고, 고인의 생전 뜻도 잘 받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