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21세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재 선발 시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그 역할을 600년 전 조선에서 과거(科擧) 시험이 했다. 지금 대학에 가려면 수능을 잘 봐야 하고, 조선 시대 성균관(지금의 국립대 격)에 들어가거나 관료가 되려면 과거를 통과해야 했다.
과거를 어떻게 운영할 것이냐. 당시 일종의 교육, 혹은 입시 논쟁이 있었다. 조선 초기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논쟁’이다. 강경은 시험관이 수험생을 한 명씩 불러 ‘압박 면접’을 통해 사서오경을 체득했는지 묻는 방식이다. 윤리성을 갖춘 인재를 선발할 수 있지만 시간, 비용이 많이 들고 인맥에 당락이 좌우될 우려가 있었다. 제술은 수험생들이 과거장에서 주어진 주제에 대한 생각을 답안지에 논술하는 방식이다. 문장력을 검증하기 좋아 공문서 작성에 능한 사람을 뽑을 수 있고 채점이 공정하다. 무엇이 좋은 인재 선발 방법이냐는 논쟁에 세종까지 참전했다.
이는 세종 중기 ‘시학(詩學)과 경학(經學)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시학은 작시(作詩·시 짓기), 즉 문예 창작이다. 경학은 유교 경전을 토대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지식을 공부하는 일이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당시 시(詩)는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전 수단 중 하나였다. 요구 사항을 시로 써서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문전(文戰·글의 전쟁)이라고도 했다. 경학은 백성의 삶을 논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경학자가 목민심서를 쓴 정약용이다. 겉보기에는 뜬구름 잡는 이념, 당파 논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의 고뇌가 있었다. 인재를 선발할 때 윤리성이 먼저인가 능력이 먼저인가.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백성의 삶을 어찌할 것인가…. 교육과 입시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존망(存亡)과 백성의 생사(生死)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최근 벌어진 우리의 ‘킬러(초고난도) 문항 논쟁’을 돌아본다.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빼라고 6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이 갑자기 지시했고 논란 끝에 9월 모의평가로 일단락됐다. 수험생 사이에선 ‘9모’가 아니라 ‘윤모(윤석열 모의평가)’였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3개월간 대통령, 교육부, 국세청이 동원되고 교육 현장이 뒤집힌 논쟁은 무엇을 남겼나. 킬러 문항이 사라진 자리는 덜 어려운 준(準)킬러 문항이 채웠고 교육은 변한 게 없다. “킬러는 없었다”는 발표에 대통령은 흡족할지 모르나, 남은 것은 이례적으로 급증한 N수생과 내심 웃는 재수학원들뿐이다. 잡겠다는 사교육비가 오히려 늘어날 판이다. 국가 존망, 국민 생사 같은 것들은 근처에도 안 갔다. 이런 무익한 논쟁에 세 달간 온 나라가 들썩이고 국력이 소모되는 사태는 모두에게 이롭지 않다. 교권 침해와 교사들의 죽음으로 무너진 학교를 추스르기도 버거운 요즘 아닌가.
이은택 정책사회부 차장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