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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 잦아들고, 조용하게 울리는[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입력 | 2023-09-16 01:40:00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768쪽·1만9500원·문학동네



이호재 기자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문장은 흡인력이 높다. 곳곳에 심어둔 복선과 적절한 은유 덕에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된다.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며 또 한번 든 생각이다.

남자 주인공, 첫사랑, 평행 세계, 도서관…. 출간 전 공개된 내용으론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너무 익숙한 서사였다. 기대만큼 불안도 많았다. 국내 출간 뒤 읽어 보니 현재 시점에선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다. 하루키가 기존 작품 세계에서 더 나아갔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말하긴 힘들다.

예를 들어 신작에서 남자, 여자 주인공이 편지로 교류하는 장면은 하루키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설정이다. 국내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진 1987년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민음사)에서도 요양원에서 지내던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편지로 소통했다. 신작에서 여자 주인공이 자신이 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고 남자 주인공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꼭 필요한지 의문이 든다. 2017년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전 2권·문학동네)에서 남자 주인공이 연상의 유부녀와 성관계를 맺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책을 계속 읽게 되는 건 매끄러운 표현력 덕이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는 남자 주인공의 고백은 사랑에 빠진 10대의 마음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풀피리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오래된 나선형 나무 계단이 있는 망루가 지키는 도시에 대한 묘사는 건조하지만 세밀하다.

빈약한 서사는 실패가 아닌 작가의 의도로 읽힌다. 하루키는 신작 출간 직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에는 대중적이고 액션이 있는 작품에 이끌렸다. 하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 차분하게 사람의 내면을 제대로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하루키는 2020년 소설집 ‘일인칭 단수’(문학동네)에서 20여 년 동안 절연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이런 걸 고려하면 신작엔 최근 작품 경향이 반영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작의 번역가 홍은주 씨는 최근 기자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신작에선 그동안 하루키의 장편에 어김없이 등장하던 모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며 “애초에 이야기를 넓히기보다 ‘좁힐’ 생각으로 파고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 홍 씨는 “최근 하루키의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날 선 긴장감, 화려함이 있던 자리에 ‘조용함’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그동안 일본 문학계에선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려면 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노년의 하루키는 이와 정반대로 내면에 집중한 작품을 내놨다. 그럼에도 14일 기준 영국의 유명 도박사이트 나이서오즈에서 하루키는 다음 달 5일(현지 시간) 발표되는 올해 노벨 문학상 유력 후보 1위에 올랐다. 물론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언급된 건 한두 번이 아니긴 하다. 그래도 하루키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신작은 그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빼놓기 힘들 것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