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사진 No. 35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신문에서는 눈에 띄는 인물 사진이 하나 있어 그 스토리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비행기 조종사의 죽음에 관한 소문을 전하는 기사입니다.
1923년 9월 15일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마지막 길의 안창남씨 – 작년 겨울 경성역을 떠날 때/ 동아일보 1923년 9월 15일
사거를 전하는 안씨
23세의 단촉한 일생
조선의 과학상 위대한 공로자
비행 기술은 일인도 감탄
◇조선의 비행가 안창남씨가 이번 재변 중에 무참히 죽었다고 동경의 전보는 필경 우리에게 야속한 소식을 전하고 말았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는 그가 설마 참으로 불행아였으랴 하는 생각이 스러지지를 아니한다. 작년 12월 10일에 한강가 여의도 벌판에서 수십만 동포의 열렬한 환호 중에 고국 방문의 대비행을 하던 광경이 지금도 오히려 우리의 눈 앞에 현저히 보이는 듯 한데 이러한 소식은 정말 야속도 심하다! 동경의 재변 중에 의외의 불행을 당한 사람이리오 참혹히 죽은 약 10만 생령 중에 몇 천명의 동포가 섞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우리는 만리 이역에서 의지가 없이 불행한 동포를 위하여 만강의 열루를 금치 못하는 바이며 안씨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과학상 위대한 공훈이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장래에 어떠한 사업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줄지 모르는 터인데 의외에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됨은 실로 통탄할 바이다.
◇불행한 소식이 과연 참이라하면 그의 최후는 얼마나 참혹하였을고 사고무친한 남의 고장에서 평일에도 눈치와 시기 속에서 외로이 분투하던 그가 재화 중에 변사를 하였다하면 그의 유해는 지금에 과연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하여도 기가 막힐 뿐이다. 안씨의 경력은 작년 고국 방문 비행때에 본지에 소상히 소개된 바이라 이제 다시 기록할 것도 없지만은 이제 흉문을 접한 우리는 다시 한번 그의 짧은 일생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다.
◇안창남씨는 금년 23세의 꽃같은 청춘이다. 그는 신축년 정월 29년에 서울 평동 안의관 집에 태어나니 그 부친은 40에 첫 아들이라 사십동이 창남은 애지중지 중에 금지옥엽같이 자라나는 중 4살에 자친을 의의고 누이의 손에 길러나서 12살이 되었을 때 누이가 출가하고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사십동이 귀한 창남은 그만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창남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쾌활하여 조금도 국축함이 없이 전도를 개척한 결과 필경은 조선에서 처음되는 비행가가 된 것인데 그는 어려서 미동 보통학교를 다니었고 휘문학교를 중도에 퇴학 한 후 대판(일본 오사카)으로 가서 자동차학교를 마친 후 열아홉살에 다시 동경으로 가서 소율비행학교를 다니어 석달만에 3등 비행사가 된 후 그 학교의 교원으로 있다가 이번에 불행한 것인데, 그의 비행에 대한 천재는 세상이 공인하는 바이라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금년 6월 초생 천엽현(일본 지바현)에서 거행한 민간비행대회에서도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2등의 명예를 얻었으며 성적으로는 일본인 간에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이 되었고 더욱이 야간비행에는 특별한 천재를 가졌으므로 그의 묘기에는 동료간에도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와 같은 실력을 인정한 일본 항공국에서는 지난 6월 31일에 아무 시험도 없이 1등 비행사 면장을 하부하였다.
◇안씨의 불행은 실로 민족적 대손실이라 하려니와 그는 평생에 말하기를 ‘나는 결코 비행기로는 죽지 않을 것이다’함을 보아 그가 얼마나 대담하고 침착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었으며 일찍이 기자와 같이 비행기를 타고 동경의 공중을 날아 다닐 때의 실제 경험을 보면 그는 공중이나 지상이나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로 언제든지 평화한 낯빛으로 장난하듯이 손을 놀리어 기계를 조종함은 그가 얼마나 비행술에 자신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중에 나는 재주가 있어서도 죽음에 들어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 안씨를 잃음은 우리의 중대한 손실이오 그 자신으로 생각하여도 원대한 희망을 품고 23세의 청춘으로 세상을 떠남은 철천의 한스러운 일이나 무정한 죽음을 어찌하리오. 다만 안씨의 일생이 비록 짧다하나 다소의 성공을 한것으로써 유명이 서로 쓰린 가슴을 위로할 뿐이다(한 기자)
▶ 우리 역사에서 안창남이라는 이름은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술을 배웠고, 1922년 12월 10일 ‘금강호’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경성 하늘을 비행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제 1차 세계대전 말미였던 1918년 미국 공군에 조종사로 임관한 이응호와 1919년 중국 남원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가 된 서왈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비행술을 선보인 것은 안창남이 맞습니다. 안창남은 1917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파일럿 아서 스미스가 용산에서 선보인 비행 퍼포먼스를 계기로 진짜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아카바네 비행제작소에 들어가 비행기 조립과 정비 기술을 익혔으며, 소율(일본 오구리)비행학교에 진학해 6개월간 비행기술수업을 이수, 1920년 11월에 비행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 해인 1921년 5월에 치러진 일본 최초의 비행자격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정식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17명 응시에 2명이 합격했고 안창남이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고국의 동포 사이에서 엄청남 인기를 얻게 된 안창남은 일본에서 자신이 소유한 비행기를 가지고 직접 고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1921년 7월부터 동아일보는 안창남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2년 10월 19일 기사를 통해 “동아일보 주최 안창남군 고국방문 대(大)비행”이라는 선전 기사를 냅니다. 안창남을 보고 싶다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고, 고국방문을 위한 일종의 캠페인을 연 것이었죠. 11월에는 동아일보사의 제안으로 ‘안창남군 고국방문후원회’가 조직되어 박영효 권동진 등 당시의 주요 인사 47명이 후원회원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안창남은 1930년 중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지금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어떻게 된 걸까요?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소문을 기사화한 것입니다. 오보입니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이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 기사화된 것입니다. 지난 주 [백년사진 No. 34] “간토 대지진에서 살아 돌아온 일본 유학생” 이야기에서 함께 보았듯이,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일본의 사회 시스템이 초토화되다시피한 대형 지진 상황에서 기자들의 취재력도 한계가 많았습니다. 위 기사에는 기사 마지막에 ‘한 기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게 기자의 성씨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한 명의 기자가 썼다는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이색적입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 기자의 이름을 발견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기사 내용을 보면, 이 기자가 일본에 가서 안창남 선생과 함께 비행기에 직접 올라 경험을 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1921년과 1922년 안창남에 대한 기사를 연속해서 작성하고 고국방문 프로젝트에서 중추 역할을 했던 기자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안창남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사를 쓴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기사에서 느낌표와 격정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 오늘은 100년 전 간토 대지진 당시 스타 비행사의 죽음과 관련한 기사와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