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독립운동 해부
최근 ‘홍범도 장군 논란’을 계기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국방부가 육사 충무관 앞에 설치된 홍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겠다고 밝히자, 이종찬 광복회장이 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죠.
6·25 전쟁 이후 반공(反共)을 국시로 내건 대한민국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미묘할 수밖에 없는데요. 하지만 이들의 항일활동에만 주목하고 공산주의 경력은 못본 채 하는 것도 온전한 역사적 평가는 아닐 겁니다. 앞서 4회(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813/120687443/1)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다뤘다면 6회에서는 그 대척점에 있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좌익 독립운동가들 그들은 누구였나
1926년 7월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경성역으로 압송된 박헌영(왼쪽 사진 오른쪽 인물). 이듬해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오른쪽 사진 가운데)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파리한 모습이다. 동아일보DB
흥미로운 건 북한이 김일성을 제외한 나머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 역사학계는 “1920년대 후반 들어 노동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이 급속히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제약성과 결함들로 인해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을 통일적으로 지도하지 못했다. 이런 결함과 약점들이 생긴 기본적 원인은 바로 공산당의 무원칙한 파벌투쟁 때문”이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습니다(김인걸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의 보급과 로동운동의 발전> 1964년, 조선로동당출판사)
한마디로 공산주의 세력간 파벌투쟁으로 인해 민족해방 및 노동해방 전선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겁니다.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거치며 소련파,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하고 유일 지배체제를 수립한 뒤에야 이런 평가가 북한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닙니다.
남한 역사학계는 북한의 지적이 사실에 부합하는 측면(파벌 투쟁에 따른 운동 역량 약화)도 있지만, 이보다는 만주에서 활동한 김일성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하 심지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인식과 논리> 2015년, 백산서당 참조) 이는 항일 무장투쟁의 적통을 김일성으로 단일화함으로서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죠.
이들은 왜 공산주의에 빠졌나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민족대회’에 참석한 조선 공산주의자들. 동아일보DB
조선이 이처럼 극동민족대회에 높은 관심을 쏟은 건 직전 미국에서 열린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에 대한 실망감이 작용한 영향도 있었습니다(4회 참조) 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의였던 만큼,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 외교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죠.
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인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소련의 지원을 얻고자 공산주의에 접근하는 결과를 낳게 되죠.
소련도 이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당초 1921년 11월로 예정돼 있던 극동민족대회 일정을 일부러 이듬해 1월로 연기하죠. 아시아인들에게 실망스런 결과를 안길 미국 워싱턴회의를 지켜본 뒤 이를 비난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등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공격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셈이죠. 이후 소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모스크바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운동 지침까지 내리게 됩니다.
소련 추종이 낳은 비극
1929년 7월 9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신간회 본부의 중앙집행위원 및 중앙검사위원 간담회 기념사진. 동아일보DB
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민족차별을 성토하며 법률 지원에 나서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쟁취, 여성 형평운동, 동양척식회사 반대 등 다양한 활동을 벌입니다. 이에 1930년 무렵 전국 약 140개 지회에 걸쳐 4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을 확보하면서 일제의 본격적인 감시와 탄압에 직면하게 되죠.
결정적인 위기는 1929년 12월에 찾아옵니다.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한다는 걸 눈치 챈 일제가 허헌, 홍명희, 조병옥 등 지도부 44명을 한꺼번에 잡아들인 겁니다. 이에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의 민족주의자들로 새로운 지도부가 꾸려졌는데, 이때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이들을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신간회 해체를 주장하죠. 그런데 이때 이들이 해체의 근거로 삼은 게 소련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국제 노동조합)의 지침이었습니다.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테제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조선공산당 해체와 민족주의자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폭로를 지시합니다. 이어 프로핀테른도 1930년 9월 테제를 통해 광주학생운동 등의 대중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자치를 약속하며 민족개량주의 부르주아를 매수하고 있다고 주장하죠.
이에 코민테른 노선을 추종한 신간회 내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에 타협적인 개량주의자들이 지도부를 장악해 투쟁 의욕이 사라졌다면서 해체론을 제기합니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본부 대의원회의 투표를 거쳐 창립 4년 만에 전격 해체되는 비운을 맞습니다.
일제 타도를 외치던 코민테른이 일제가 그토록 집요하게 탄압한 신간회 해체에 일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거죠. 일제와 코민테른 모두 조선인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후 일제가 무너질때까지 신간회와 같은 좌우 합작의 독립운동 단체는 출현하지 못합니다. 좌우 분열로 독립운동 역량이 약화되는 결과를 빚은 거죠.
홍범도 장군(왼쪽)이 1929년 소련 연해주에서 부인(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동아일보DB
참변 직후 소련은 홍범도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끌어들여 생존한 독립군 부대원들을 처벌합니다. 홍 장군은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여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존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그의 결정을 간도 독립군부대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 조선인 2명이 1923년 8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홍 장군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홍 장군은 레닌에게 하사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를 받고 석방됩니다. 하지만 이후 다시는 독립군 부대를 이끌지 못하죠.
사실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소련 추종은 이웃 중국 공산주의자들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물론 중국 공산주의자들도 초기에는 모스크바 유학파를 중심으로 코민테른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행태를 보입니다. 하지만 1935년 1월 ‘쭌이(遵義)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토종파가 소련파를 제압하고 당권을 쥐면서 독자 노선을 걷게 되죠(이하 박노자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2021년, 나무연필 참조)
마오쩌둥은 당시 당권을 쥔 왕밍 등 소련파의 노선이 중국 실정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이고 비대중적인 방침이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후 마오쩌둥은 국민당과 통일전선을 구축하라는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고 내전을 벌이게 되죠.
결국 중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소련 추종은 독자 노선이나 방침이 없었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조선 공산주의자로서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한 한위건의 발언에서도 확인됩니다. 한위건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외국의 선진 이론을 재빨리 수입한 것이지,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소련 ‘패권주의’에 이용된 측면
1920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한 레닌(뒷줄 오른쪽 네번째)과 조선 공산주의자 박진순(레닌 오른쪽). 임경순 교수 제공
이에 대해 소련이 극동지역에서 일제와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자국 이익을 중심에 놓고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접근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이하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2015년, 돌베개 참조)
실제로 1922년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등 극동지역에서 안보 위협이 해소되자, 소련은 고려공산당과 독립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본이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극동에서 팽창주의를 추구하자, 위협을 느낀 소련은 기존 노선을 바꿔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 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 구축을 지시하죠.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서 핵심이던 ‘좌우 합작’ 노선을 조선의 내부 사정보다는 소련의 국익을 앞세워 결정한 겁니다.
이처럼 소련의 자국 이기주의와, 이런 소련의 방침을 추종한 행태로 인해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난관에 부닥친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네 차례에 걸친 일제의 대대적인 지도부 검거 등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조선공산당은 해방 전까지 재건되지 못하죠. 그러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투쟁을 벌인 데 대해선 김일성과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