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내 삶의 좌표는 어디인가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담긴 ‘미궁’ (1425년) 그림.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로·미궁을 걷는 이의 숙명은 미로·미궁의 전체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펼쳐지는 길을 걸어가야 할 뿐, 갈림길이 나오면 선택해야 할 뿐, 그 길이 언제쯤 끝날지 혹은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대체 이 길의 어디쯤 서 있는 건가. 이 질문은 길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답할 수 있다. 나는 대체 이 삶의 어디쯤 서 있는 건가. 이 질문은 삶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답할 수 있다.
프랑스 생오메르성 성 베르탱 수도원에 설치된 미궁의 모습을 담은 그림. 윌리엄 헨리 매슈스의 저서 ‘미로와 미궁’(1922년)에 담겨 있다. 사진 출처 퍼블릭도메인리뷰 홈페이지
우리는 삶의 행로를 늘 걷고 있다. 그러니 자기 좌표를 알기 어렵다. 우리의 좌표를 알려줄 삶의 지도 혹은 조감도 같은 것이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신이 아닌 인간은 살아서 삶을 벗어날 수 없기에 신과 같은 ‘조감’은 불가능하다. 동시에,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추상 능력이 있다. 눈앞을 휙휙 지나쳐가는 삶의 국면들에 사로잡히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때로 삶 전체를 조감하고 싶어 한다. 내 삶의 좌표는 어디인가. 삶 자체를 바라보고 싶다. 이렇게 인간은 인간 나름의 초월을 꿈꾼다.
인간적인 초월은 예술을 통해 잠깐씩 가능하다. 화가의 궁극적 포부는 삶을 그리는 것이다. 누군가 돌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숲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시든 꽃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누드를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해골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물에 빠진 이상 젖을 수밖에 없듯이, 태어난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법. 화가의 궁극적 목표는 그림을 많이 팔아 부자가 되거나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명예를 얻는 데 있지 않다. 화가의 목표는 결국 삶을 그리는 것이요, 조각가의 목표는 결국 삶을 조각하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신의 일이겠지만 그 삶을 재현해내는 것은 예술가의 일이다.
김범의 ‘친숙한 고통’. 작가가 고통에 미로의 형식을 부여한 것은 놀랍다. 미로, 미궁의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사람은 잠시나마 그곳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다. 리움미술관 제공
김범은 김선정 예술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의 모습은 대체로 밝아 보이지 않았고 거대하고 어리석은 힘이 그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지금도 사회라는 크고 먼 앵글 속에 보이는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김범이 고통이 친숙하다고 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고통에 미로의 형식을 부여한 것은 놀랍다. 그가 미로·미궁에 갇혀 있는 모습이 아니라 미로 전체를 조감해서 그렸다는 점은 더 놀랍다. 미로·미궁을 조감할 수 있는 사람은 잠시나마 미로·미궁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다.
고통을 느끼는 일과 고통을 그리는 일은 다르다. 고통은 감각이기에 고통을 겪지 않으면 고통을 알 수 없고, 고통에 대해 전혀 모르면 고통을 그릴 수도 없다. 동시에 고통은 사무치기에, 그 사무침에 잠식되면 고통을 바라볼 수 없고, 고통을 바라볼 수 없으면 고통을 그려낼 수 없다.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아야 비로소 고통을 그릴 수 있다. 고통을 그렸다고 고통을 떨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에 형식을 부여하는 그 순간만큼은 고통에 압도되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은 형식이 부여된 그 고통을 조감함으로써 잠시 자신의 고통을 잊는다. 이렇게 예술은 잠시나마 사람을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