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삶이라는 미로를 견디는 법[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3-09-18 00:52:00

〈73〉 내 삶의 좌표는 어디인가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담긴 ‘미궁’ (1425년) 그림.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삶은 미로(Maze)일까, 미궁(Labyrinth)일까. 미궁은 하나의 길이 이리저리 돌다가 결국은 귀착지에 이르는 구조이지만, 미로는 갈림길이 도처에 있어 귀착지에 이른다는 보장이 없는 구조다. 삶은 미로인가, 미궁인가.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미로를 닮았고, 결국 죽음이라는 귀착지에 이르게 만든다는 점에서 미궁을 닮았다.

미로·미궁을 걷는 이의 숙명은 미로·미궁의 전체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펼쳐지는 길을 걸어가야 할 뿐, 갈림길이 나오면 선택해야 할 뿐, 그 길이 언제쯤 끝날지 혹은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대체 이 길의 어디쯤 서 있는 건가. 이 질문은 길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답할 수 있다. 나는 대체 이 삶의 어디쯤 서 있는 건가. 이 질문은 삶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답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이라는 미로·미궁을 걷는 일은 마치 그랜드캐니언이나 만리장성을 걷는 일과 비슷하다. 그랜드캐니언 속을 걸어서는 ‘그랜드’함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결코 그랜드캐니언 전체를 볼 수 없다. 만리장성을 걸어서는 ‘만 리’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만 리 전체를 볼 수 없다. 거대한 것의 전모를 보기 위해서는 새처럼 조감(鳥瞰)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

프랑스 생오메르성 성 베르탱 수도원에 설치된 미궁의 모습을 담은 그림. 윌리엄 헨리 매슈스의 저서 ‘미로와 미궁’(1922년)에 담겨 있다. 사진 출처 퍼블릭도메인리뷰 홈페이지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드 세르토는 공간 개념을 ‘플레이스(place)’와 ‘스페이스(space)’로 양분한 적이 있다. 플레이스란 공간 구성 요소들이 동시적으로 배치된 상태다. 스페이스는 공간 구성 요소들이 시간 속에서 유동적으로 경험되는 상태다. 예컨대, 지도의 구성 요소들은 동시적으로 배치돼 있기에, 지도가 보여주는 공간은 플레이스다. 거리의 구성 요소들은 보행자를 휙휙 지나쳐 가버리기에, 보행자가 경험하는 공간은 스페이스다. 스페이스 속에서는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자기 좌표를 알고 싶으면 걷기를 멈추고 공간을 조감해주는 지도를 봐야 한다. 즉, 스페이스 경험하기를 중지하고 플레이스를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삶의 행로를 늘 걷고 있다. 그러니 자기 좌표를 알기 어렵다. 우리의 좌표를 알려줄 삶의 지도 혹은 조감도 같은 것이 있을까. 그런 것은 없다. 신이 아닌 인간은 살아서 삶을 벗어날 수 없기에 신과 같은 ‘조감’은 불가능하다. 동시에,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추상 능력이 있다. 눈앞을 휙휙 지나쳐가는 삶의 국면들에 사로잡히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때로 삶 전체를 조감하고 싶어 한다. 내 삶의 좌표는 어디인가. 삶 자체를 바라보고 싶다. 이렇게 인간은 인간 나름의 초월을 꿈꾼다.

인간적인 초월은 예술을 통해 잠깐씩 가능하다. 화가의 궁극적 포부는 삶을 그리는 것이다. 누군가 돌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숲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시든 꽃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누드를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해골을 그렸다고? 나는 그게 삶을 그리는 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물에 빠진 이상 젖을 수밖에 없듯이, 태어난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법. 화가의 궁극적 목표는 그림을 많이 팔아 부자가 되거나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명예를 얻는 데 있지 않다. 화가의 목표는 결국 삶을 그리는 것이요, 조각가의 목표는 결국 삶을 조각하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신의 일이겠지만 그 삶을 재현해내는 것은 예술가의 일이다.

김범의 ‘친숙한 고통’. 작가가 고통에 미로의 형식을 부여한 것은 놀랍다. 미로, 미궁의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사람은 잠시나마 그곳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다. 리움미술관 제공

이제, 작가 김범의 ‘친숙한 고통’이라는 그림을 보자. 처음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이것이 미로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김범은 미로를 그린 것일까. 제목이 ‘미로’가 아니라 ‘친숙한 고통’이라는 점을 알았을 때, 그 질문은 바뀌었다. 왜 김범은 고통을 미로의 형태로 그린 것일까. 고통은 원래 형식이 없다. 김범은 미로를 그림으로써 고통에 형식을 부여한 것이다. 왜 고통이 하필 미로의 형태를 띠는가. 벗어나고자 하니까? 왜 친숙하다는 것일까. 고통은 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니까?

김범은 김선정 예술감독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의 모습은 대체로 밝아 보이지 않았고 거대하고 어리석은 힘이 그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지금도 사회라는 크고 먼 앵글 속에 보이는 사람들은 종종 그렇게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 김범이 고통이 친숙하다고 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고통에 미로의 형식을 부여한 것은 놀랍다. 그가 미로·미궁에 갇혀 있는 모습이 아니라 미로 전체를 조감해서 그렸다는 점은 더 놀랍다. 미로·미궁을 조감할 수 있는 사람은 잠시나마 미로·미궁에서 빠져나온 사람이다.

고통을 느끼는 일과 고통을 그리는 일은 다르다. 고통은 감각이기에 고통을 겪지 않으면 고통을 알 수 없고, 고통에 대해 전혀 모르면 고통을 그릴 수도 없다. 동시에 고통은 사무치기에, 그 사무침에 잠식되면 고통을 바라볼 수 없고, 고통을 바라볼 수 없으면 고통을 그려낼 수 없다.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아야 비로소 고통을 그릴 수 있다. 고통을 그렸다고 고통을 떨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에 형식을 부여하는 그 순간만큼은 고통에 압도되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은 형식이 부여된 그 고통을 조감함으로써 잠시 자신의 고통을 잊는다. 이렇게 예술은 잠시나마 사람을 구원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