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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여자배구… 올림픽 4강팀이 2년 새 ‘동네북’[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3-09-19 23:35:00

위기의 한국 여자배구
김연경 은퇴 후 5승 31패… 곤살레스 감독 지도력도 물음표
배구팀 中 21개 高 18개가 전부… “키큰 선수 데려다 공격만 가르쳐”
프로 연봉 올라도 경기력은 하락… “이참에 장기 플랜 세워야”




6월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실점한 한국 선수들(오른쪽)이 서로를 다독이는 모습. 뉴스1

강홍구 스포츠부 기자

《한국 여자 배구는 2021년 8월 도쿄 올림픽 4강에 들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동네북’에 가까운 신세가 됐다. 이달 열린 아시아 여자배구선수권대회에서 14개 참가국 중 6위에 그쳤다. ‘세계 4강’이던 한국 여자 배구가 ‘아시아 4강’에도 들지 못한 것이다. 한국 여자 배구가 1975년 창설된 아시아선수권에서 4강에 오르지 못한 건 올해가 처음이다.》





● 김연경 떠난 뒤 구심점 잃어

2024년 파리 올림픽 여자 배구 예선이 17일부터 폴란드에서 열리고 있다. 그런데 한국이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딸 거라 믿는 배구 관계자는 거의 없다. 23일 개막하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전망도 밝지 않다. 그동안 한국 여자 배구가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건 2006년 도하 대회(5위)가 유일하다. 당시 18세였던 ‘배구 여제’ 김연경(35)이 무릎 수술을 받아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는데도 대표팀에 선발한 게 결국 화근이 됐다. 2023년 현재도 한국 여자 배구는 ‘김연경 이후’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대표 간판 아웃사이드 히터였던 김연경은 도쿄 올림픽이 끝난 뒤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김연경과 함께 대표팀을 이끌던 김수지(36), 양효진(34·이상 미들블로커)도 나란히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또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44·이탈리아)이 떠나고 수석 코치로 라바리니 감독을 보좌했던 세사르 에르난데스 곤살레스 감독(46·스페인)이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한국은 2년 동안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24전 전패를 당하는 등 아시아선수권까지 36경기 5승 31패(승률 13.9%)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남겼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조 ‘최하위 결정전’에서 크로아티아에 이겼고 나머지 4승은 이번 아시아선수권에서 대만(45위), 우즈베키스탄(81위), 호주(63위), 인도(65위)를 상대로 따낸 것이다. 그러면서 도쿄 올림픽 때 14위였던 세계랭킹도 36위까지 떨어졌다. 이제 한국 여자 배구는 남자 배구(27위)보다 세계랭킹이 더 낮다.

해설위원 A는 “김연경이 빠진 뒤 수십 경기를 치르면서 확실한 선발 라인업조차 꾸리지 못한 걸 보면 곤살레스 감독의 지도력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서 “외국인 감독 선임과 전임 감독제를 원점에서 다시 살펴봐야 한다. 예전처럼 국내 프로 팀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겸임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선수들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심판 B는 “선수들 사이에 구심점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프로배구 여자 선수 평균 연봉이 1억5200만 원(2023∼2024시즌 기준)까지 올라가면서 선수들이 국제대회 출전에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실질적인 보상’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들렸다. 일례로 야구는 국제대회 참가 및 성적에 따라 자유계약선수(FA) 자격 획득에 필요한 선수 등록 일수를 추가로 제공한다. 축구는 A매치(국가대항전)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해외 진출 기회로 이어지는 ‘쇼 케이스’ 역할을 한다.




● 女高 배구팀 한국 18개 vs 일본 3534개


배구계에서는 ‘국가대표 B팀’을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가령 올림픽 예선에 A팀이 나간다면 아시아선수권에는 B팀을 내보내는 등 대회 수준에 따라 팀을 따로 운영해 긴 호흡으로 대회를 준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산이다. 대한배구협회는 국민체육진흥기금에 주로 의존하고 있어 B팀 운영에 드는 예산을 추가로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프로 팀 관계자 C는 “축구만 해도 스폰서 후원은 물론이고 중계권, 입장료 등 수입원이 다양하다. 배구협회도 대표팀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등 자체 수입을 늘리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구 단체가 이원화된 것도 문제다. 현재 대표팀은 배구협회, 프로배구 V리그는 한국배구연맹(KOVO)이 관장하고 있다. 외국인 선수 에이전트 D는 “올림픽을 앞두고는 자국 리그 일정을 축소하는 나라도 있다. 대표팀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고민해 볼 만한 문제”라고 말했다.

B팀까지 운영하기엔 ‘선수가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유소년 배구부터 사정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국내 여자 배구팀 수는 중학교 21개, 고등학교 18개가 전부다. 선수도 중학교 271명, 고등학교 204명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은 중등부에 6741개, 고등부에 3534개의 팀이 있다. 예전에 ‘센바쓰(選拔·선발)’라고 불리던 일본고교배구선수권대회 본선 참가 팀 수가 52개로 한국 전체 여고 팀보다 3배 가까이 많다. 이런 배구 저변을 바탕으로 일본은 세계랭킹 8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학교 배구부 수를 단기간에 늘리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게다가 새 시즌부터는 프로팀들이 기존 외국인 선수 외에 아시아 지역 선수를 추가로 보유하는 ‘아시아 쿼터’를 도입하면서 학교 배구부를 운영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아시아 쿼터 도입 이후 프로 구단들이 신인 드래프트 순번에 따라 각 학교에 주던 지원금을 점차 줄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 10년 뒤까지 보는 장기 플랜 세워야


KOVO가 아시아 쿼터를 도입한 건 ‘제대로 된 유망주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프로팀들의 하소연 때문이다. 프로 감독 E는 “기본기가 부족한 신인들이 너무 많다.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뽑을 만한 재목이 점점 줄고 있다”고 했다. 프로 코치 F도 “그저 키 큰 선수들을 뽑아다가 공격부터 시키는 게 학교 배구부의 현주소다. 선수별 장단점을 잘 파악해 맞춤형 지도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2005년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 김연경(192cm)이 공격과 수비를 모두 잘하는 ‘세계 톱클래스’ 선수가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어릴 때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김연경은 중학교 시절 키가 158cm밖에 되지 않아 ‘(수비 전문 선수) 리베로라도 되자’는 생각으로 수비 연습에 매달렸다. 그러다 고교 1학년 때 갑자기 20cm가 자란 뒤로 공격수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일본 여자 배구 대표팀 주장 고가 사리나(27·NEC)도 180cm로 배구 선수치고는 큰 편이 아니다. 그래도 올해 VNL에서 209득점(9위), 디그(상대 득점을 막아낸 수비) 118개(12위)를 기록하면서 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기본기를 갖춘 선수를 발굴하려면 유소년 배구클럽이나 아카데미 등을 활성화해 취미로 배구를 시작한 이들이 ‘엘리트 스포츠’로 넘어오도록 유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귀화 선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브라질배구연맹은 2028년 로스앤젤레스(LA), 2032년 브리즈번 올림픽까지 대비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한때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브라질 남녀 대표팀이 나란히 세계랭킹 4위까지 떨어지자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십년지계를 세운 것이다. 한국 배구는 코앞에 닥친 대회 성적에만 목을 매는 게 현실이다. 프로팀 감독 G는 “뭔가를 하루아침에 바꾼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세계 배구의 흐름을 파악하고 한국 배구의 현실과 특성을 고려한 장기 플랜을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홍구 스포츠부 기자 wind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