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은 아무 의병이나 독립군이 아니라 공산주의 계열 의병이나 독립군 의미 홍범도의 죄는 단순히 빨치산이라는 게 아니라 자유시서 한 짓이 독립군 파탄 초래했다는 것
송평인 논설위원
역사학회 등 51개 역사단체가 홍범도 흉상 철거에 반대하면서 “빨치산은 비정규군이란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의병이나 독립군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빨치산은 의병이나 독립군을 지칭할 때는 대개 특정한, 다시 말해 공산주의 계열에 사용됐다. 홍범도 당시의 빨치산부터 그렇다. 역사학계가 좌파에 장악돼 전문가의 권위로 일반인을 오도하는 건 역사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홍범도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진 이인섭이라는 빨치산은 ‘1965년 9월 18일 김세일 동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대강 이렇게 썼다. “의병은 갑오농민전쟁 시기 의병, 을사조약 정미7조약 군대해산 시기 의병, 경술 합병 후의 의병이 있다. 독립군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 당시 중령(中領·중국 영토)과 아령(俄嶺·러시아 영토)으로 이전해 무장 투쟁한 부류다. 빨치산은 소련에서 국민전쟁(러시아 10월 혁명 후 내전) 당시 조선 민족주의 독립운동이 사회주의적으로 전환되면서 등장했다.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빨치산 때까지 계속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홍범도밖에 없다.”
김승빈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 출신으로 홍범도 부하가 된 빨치산이다. 그는 ‘1970년 김세일 동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10월 혁명에 대한 보도에 접하자 원동(遠東)의 조선 사람들도 농촌에서 소비에트 기관을 선거 조직하는 사업에 나섰다. 원동에서 공민전쟁(내전)이 시작하는 때에 한인사회주의자동맹은 조선 사람들로 적위군 부대를 조직하여 전선으로 내보냈으며 연해주 수청에서는 한창걸 동무를 비롯한 25명의 니콜라엡스카야 촌(村)소비에트 위원들의 창발적 열성에 의해 빨치산 부대가 조직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조선인 빨치산 운동은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확대 강화됐다”고 썼다.
홍범도의 씻을 수 없는 과오는 간도에서 넘어온 어느 부대보다 무장해제에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김좌진 이범석 등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은 러시아령 입국 직전 돌아가 버렸다. 입국한 중심 인물은 봉오동 전투의 세 주역인 홍범도 최진동 안무다. 그러나 최진동과 안무의 부대만 해도 자유시 사변 당일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됐다가 풀려났다. 홍범도의 부대(정확히는 신흥무관학교 교성대 출신 이청천 부대를 포함한 홍범도 부대)만 사변 전에 무장해제를 주도한 이르크추크파에 넘어가 그쪽 편에 섰다. 그의 부대가 사변 당일 토벌에 나섰다는 기록은 없지만 다음 날 전장(戰場) 소제(掃除)를 했다는 당시 부대 지휘관 김승빈의 증언이 있다. 싸움은 어느 한편에 서서 2선에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되지 않는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에 깊이 연루돼 있다.
자유시 사변의 피해 상황은 당시 참가자들에게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한 측은 피해를 축소했고 공격당한 측은 과장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코민테른 전권위원 오홀라의 보고에 따르면 익사자 60여 명을 포함해 전체 사망자는 120여 명이다. 포로로 된 후 탈출 강제노동 수감 등의 과정에서 또 수십 명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사실은 연해주 기반의 사할린부대를 빼고도 1000명에 가까운 간도 독립군이 일시적 무장해제를 거쳐 결국 영구히 무장해제됐다는 것이다.
자유시 사변 후 최진동과 안무는 다시 간도로 돌아갔다. 홍범도와 함께 무장해제에 앞장선 이청천은 러시아 적군으로 편제돼 사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던 중 노선 차이로 체포됐다 풀려난 후 중국으로 건너왔다. 홍범도만 레닌의 포상도 받으면서 그곳에 남았다.
홍범도가 죽었을 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는 이런 부고 기사를 냈다. “홍범도 동무는 레닌-스탈린당의 충직한 당원으로서…당의 사명을 꾸준히 실행하기에 정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시점에서 100년 전 빨치산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빨치산으로 독립군의 전력을 파탄 내고 소련을 새 조국으로 삼은 사람이 대한민국 건국과 군과 육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