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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보다 미친놈이 낫다”… 아르헨 대선 ‘극우’ 밀레이 돌풍

입력 | 2023-09-22 03:00:00

아르헨티나 대선 D-30 〈상〉
물가상승률 124%-빈곤율 40% 등 국민들 경제난에 기성 정치권 불신
밀레이, 좌-우파 모두 비판하며 인기
‘중앙은행 폐지-달러 공용통화’ 공약… ‘장기-신생아 매매 허용’ 파격 주장도



지난달 13일 아르헨티나 대선 예비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하비에르 밀레이 자유전진당 후보가 1위 확정 직후 지지층을 향해 오른손을 치켜들며 연설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P 뉴시스


브라질에 이은 남미 2위 경제대국 아르헨티나의 대선 1차 투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극우 경제학자 하비에르 밀레이 자유전진당 후보(53), 우파 야당 연합의 파트리시아 불리치 전 안전장관(67), 집권 좌파 페론당 소속 세르히오 마사 경제장관(51)이 다음 달 22일 대선을 앞두고 치열한 3파전을 벌이고 있다. 1차 투표에서 유효 투표의 45% 이상 또는 40% 이상 득표율에 2위와의 격차가 10%포인트 이상인 후보가 없으면 1, 2위 후보가 11월 19일 결선투표를 치른다.

최종 승자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현 좌파 정권에서 우파로의 교체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선거 결과가 12월 칠레의 헌법 개정 국민투표와 내년 6월 멕시코 대선 등 중남미 주요국의 선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돼 이에 관한 기사를 3차례 게재한다.

“경제난, 치안 불안 등에 대한 분노가 밀레이 지지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는 밀레이 후보의 인기가 뜨겁다. 지지율 1.5% 미만의 군소 후보를 걸러내기 위한 지난달 대선 예비선거에서 깜짝 1위를 차지했을 때만 해도 그의 인기가 ‘반짝 돌풍’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이후 한 달 넘게 지지율 1위를 고수하자 정계 데뷔 직후 백악관 주인이 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처럼 밀레이 후보 또한 대선 승자가 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여론조사회사 아날로히아스가 3∼5일 실시한 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31.1%였다. 마사 장관(28.1%), 불리치 전 장관(21.2%)을 앞섰다.

밀레이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여야 기성 정치인 모두를 비판하며 표심을 파고들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124.4% 높았다. 빈곤율은 40%에 달해 서민 고통이 상당하다.

그는 분배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에 극단적 혐오를 드러낸다. 국민 4600만 명의 63%가 가톨릭이며 본인 또한 가톨릭 신자인데도 자국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양극화 해소 등을 주문한다며 비판한다. 교황에게는 “망할 공산주의자, 악마, 똥덩어리”라고, 사회주의자에 대해선 “쓰레기, 인간 배설물”이라고 막말을 하는데도 지지세가 여전하다.



● “장기-신생아 매매 허용” 주장

이탈리아 이민자 후손인 밀레이는 1970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버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학대, 동급생의 괴롭힘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때 유일한 버팀목이 됐던 사람은 여동생 카리나(50). 미혼인 밀레이는 여러 인터뷰에서 “카리나는 내 상관”이라며 “대통령이 되면 여동생이 대통령 부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벨그라노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러 대학에서 20여 년간 경제학을 가르쳤다. TV, 라디오 등에 단골로 출연하며 좌파와 우파 정권 모두 경제난을 가중시켰다고 싸잡아 비판해 인지도를 얻었다. 2018년 자유전진당을 창당했고 불과 5년 만에 지지율 1위 대선 후보가 됐다.

경제 분야에서는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정책을 강조한다. 초(超)인플레로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페소를 버리고 미 달러를 쓰자며 “집권 즉시 달러를 공용 통화로 채택하겠다”고 했다. 경제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중앙은행도 없애 버리자며 중앙은행 건물 모형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7일 한 포럼에서는 “세금 부과는 절도”라며 농산물 수출세 폐지, 노동세 감면 등을 주장했다. 공기업 민영화, 정부 지출 삭감 등도 외친다.

장기 및 신생아 매매도 찬성한다. 그는 “수천 명이 장기 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장 메커니즘을 찾아야 한다”며 장기 판매를 합법화하고 신생아 거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약 합법화, 개인의 무기 소지 허용, 기후위기 부정, 무제한에 가까운 자원 개발 허용 등도 대표 정책이다.



● 부유층-극빈층에 모두 인기
극단 성향의 밀레이가 지지율 1위를 고수하는 이유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가 꼽힌다. 올여름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45일 머물렀던 손혜현 한국외국어대 지역대학원 객원교수는 “현 좌파 정권과 이전 우파 정권 모두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도둑놈’(부패한 기성 정당 후보)보다 ‘미친놈’(밀레이 후보)이 낫다는 말이 나온다”며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특히 미국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지만 주위 시선을 의식해 이를 드러내지 않는 ‘샤이 트럼프’가 많았듯 아르헨티나 현지에서도 ‘샤이 밀레이’가 적지 않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부유층과 극빈층 모두에게 인기가 높다는 점도 이례적이다. 예비선거 당시 그는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으로 꼽히는 후후이주 엘카르멘, 부유층 거주지인 추부트주 리오치코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손 교수는 “좌파와 우파 정권 모두 경제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두 진영 모두를 신뢰할 수 없다는 유권자가 많다. 그래서 양측이 ‘진자(振子)의 추’처럼 번갈아 집권하고 그 와중에 경제난이 악화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밀레이 후보에게 기존 좌·우파 정당을 모두 넌더리 내는 유권자의 지지가 쏠렸다는 것이다.

현지 언론 라나시온 등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간 방역에 관한 각종 국가의 개입이 늘어난 것도 사실상 ‘무(無)정부’를 지향하는 그의 인기를 높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 “中은 암살자”…친미 반중 성향
밀레이가 집권하면 대외 정책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그는 현 좌파 정권의 친(親)중국, 반(反)미국 대외 정책을 바꾸겠다고 했다. 특히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자국 내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한다는 이유로 ‘암살자’라고 비판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 삼겠다”고도 했다. 다만 노조에 친화적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역시 “사회주의자”라는 비판을 가했다.

다만 그를 포함한 세 명의 주요 후보가 누구도 지지율 40%를 넘지 못한 만큼 다음 달 1차 투표에서 승자가 확정되기는 힘들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에 후보 간 합종연횡에 따라 11월 결선투표에서 당선자가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박효목 기자 tree624@donga.com
김보라 기자 purp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