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에서 인생2막 이숙희 씨 20년 간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 생활 현장에선 ‘설비 아지매’로 불려 57세에 초중고 검정고시 통과 온가족이 똘똘 뭉쳐 엄마의 열공 응원
“하이고, 제가 뭐라고, 이렇게 멀리까지…”
그를 수소문해 인터뷰 약속을 잡을 때 이숙희(64) 씨가 되뇌었던 말은 ‘제가 뭐라고’였다. 그는 4년 전부터 딸 권기순(40)씨가 원장인 한의원에서 간호조무사 일을 하고 있다.
이 씨는 지난해 경상남도가 주최한 ‘인생이모작 성공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환자가 한번 침상에 누우면 몸에 닿았던 수건들은 무조건 세탁실로 간다. 그래서 한의원 한쪽에서는 세탁기 3대, 건조기 2대가 쉴새없이 돌아간다.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일할 때는 철저하게 ‘원장 선생님’과 ‘숙희 쌤’이다. 환자 차트를 보며 이숙희 씨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권기순 원장.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27세부터는 혼자가 된 시어머니(당시 57세)를 모셨고, 30대 후반부터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 속칭 ‘노가다’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병약한 시어머니와 아들딸 5식구가 살아가려니 남편의 외벌이로는 부족했다.
현장에서는 ‘설비 아지매’로 불렸다. 아파트 공사 초기에 수도관이나 수전, 양변기 등을 설치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 동파이프 용접 정도는 식은죽 먹기로 해냈다.
공사장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던 시절의 사진은 전혀 없다고 한다. 의무안전교육을 받은 뒤 단체로 ‘증거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너도나도 뒤로 가 얼굴이 안 나오게 하려 애썼다고. 유일하게 그 시절의 흔적으로 남은 게 카드 형태의 이 교육이수증이다. 이숙희 씨 제공
20대 초반,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숙희 씨. 공장시절 사진은 이게 유일한데, 이것도 회사에서 홍보용으로 찍었던 것들 중 한 장을 준 것같다고 기억한다. 이숙희 씨 제공
한의원에 도착하니 남편 권씨도 와 있었다. 아내에게 중요한 날이니 기사 노릇을 자처했다고. 무언의 응원이 느껴졌다. 저녁 7시, 진료가 끝나자 눈코뜰새없이 바빴던 권원장도 합류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권씨가 한마디 거든다. “못 배웠어도 사람이 똑똑하면 되는기라. 당신은 똑똑하잖아.”
평생의 한을 푼 실마리는 61세 지인이 인터넷 강의로 공부해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땄다는 소식.
“귀가 번쩍 뜨였죠. 학원에는 창피해서 못 가지만 인강이라면 혼자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겠구나…”
그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한 거였는데, 딸은 “그게 뭐 대수라고, 검정고시 보면 되지”라며 집 근처 초등학교에 문의해 해결책을 가져왔다.
그로부터 1년 4개월 만에 이 씨는 초중고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했다. 초등학교는 한달 여 독학으로 공부한 뒤 2015년 3월에, 중학교는 5월에 합격증을 받았다. 고교 합격증은 이듬해 5월에 받았다.
“고등학교 과정은 독학만으로는 벅차서 학원에서 공부했지요.”
기초가 없는 수학이 문제였다. 구원투수는 가까이에 있었다. 공고와 폴리텍을 나온 ‘이과계’ 남편 권 씨가 밤마다 밥상을 펴놓고 수학과외를 해줬다.
대망의 고교 졸업증서는 손에 넣었지만 수학능력시험을 볼 자신은 없었다. 딸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보라고 권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로지 대학에만 향해 있었다. 그러다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학도들이 가는 2년제 주말대학’ 정보를 얻게 된다.
이 씨가 2015년 5월부터 2016년 8월 사이에 받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시험 합격증. 사진이 작아 독자 편의를 위해 발급일시만 인위적으로 확대했다.
리포트도 써보고 MT도 가고, 학사모 쓰고 졸업사진도 찍었습니다.
저는 평생 동창이 없었잖아요. 남들이 학창시절 얘기하면 낄 수가 없었죠. 그런 제게도 대학동창에 교수님까지 생긴 거예요.”
사실 ‘만학도를 위한 선택지’는 하나 더 있었다. 국립창원대에 개설된 4년제 ‘자산관리학과’가 그것. 며느리가 영어교사란 점도 고려해 아들 부부에게 상담을 청했더니 2년제 쪽을 추천해줬다고.
“자산관리는 저로서는 별로 써먹을 데가 없지요. 하하.”
“그 즈음 가조도에 의료봉사를 갔는데 엄마가 와서 도와줬어요. 교실을 빌려 지역 어르신 30여 명을 치료해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기분 좋아하시는 거예요.
한의원에서도 일손이 부족하면 엄마가 가끔 허드렛일을 도와주셨는데 일 파악도 잘 하시고 정말 믿음직했어요.
‘간호학원 1년이면 간호조무사 자격증 딸 수 있는데, 그거 따서 우리 한의원에서 일하시면 어떠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1년 간 주중에는 간호학원, 주말에는 대학강의를 듣는 강행군을 벌인 끝에 2019년 봄, 만 60세에 이 씨는 간호조무사 자격증과 대학졸업장을 모두 따냈다.
“간호학원 상담 과장님이 ‘학원 창립 이래 60세 넘어 합격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너무 고맙다’고 하셨어요. 제가 고맙죠. 안 받아주셨으면 제가 어떻게… ”
사실 간호학원 입학할 때 여러 군데에서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이 학원 상담과장은 훗날 “여러 사람 만나다 보니 나름 사람보는 눈이 생겼는데, 이 분은 해낼 것 같았다”고 말해줬다고 한다.
대학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 이숙희 씨와 동기동창들. 이숙희 씨 제공
2019년 이숙희 씨의 대학졸업식에는 온 가족이 축하에 나섰다. 왼쪽은 울산에서 달려온 아들 권도욱 씨 가족. 이숙희 씨 제공
“2남 4녀 중 막내딸이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집이 시골에서 안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아버지가 학교에 전학수속을 밟아줘야 하는데 시기를 놓쳤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언니오빠들은 모두 출가하거나 집을 나갔고 어느 틈에 제가 소녀가장이 돼 있더군요. 부모님 모두 예순이 넘으셨고요. 열넷 정도부터 집근처 과자공장에 다니기 시작했죠.”
그뒤로는 아무도 학교 얘길 꺼내지 않았다. 19세 때에는 친척의 소개로 구미의 섬유공장에 취직했다.
이 무렵 전남 광주에서 공군 중사로 근무하던 남편 권 씨와 펜팔로 연결됐고, 권씨가 창원의 기능대(현재의 폴리텍대)에서 공부하면서 창원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 사람이 이렇게 멋있었다니까요.” 이 씨는 이렇게 말하며 두 사람이 펜팔로 연애하던 시절 공군 중사 모습의 남편 권 씨 사진을 보여줬다. 이숙희 씨 제공
“제 마음 속에 정해둔 원칙이 있었어요. 해가 지면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한다, 가족 저녁밥은 내가 차려야 한다는 원칙이죠. 해질녘 귀가할 수 있으면서 학력 없이도 할 수 있는 일, 선택지가 없었지요.”
이 일은 당시에도 벌이가 쏠쏠했다. 남편보다 많이 벌 때도 적지 않았다.
2002년, 최악의 시련이 닥쳐왔다. 딸이 대학입시에서 떨어져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학원비기숙사비를 대야 했는데 남편은 다니던 대기업에서 ‘잘렸다’. 어머니 병세는 더욱 나빠져 대소변 수발이 필수가 됐다. 집을 사며 얻은 대출도 있었다.
당시 그는 늘 불안했다고 한다.
“새벽 6시에 어머니 점심까지 차려놓고, 요강 준비 다 해놓고 나가요. 고교생이던 아들이 할머니 요강수발을 많이 도와줬어요.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혹시라도 나 없는 사이 어머니 혼자 돌아가셨을까봐…
현관에서부터 ‘어머니, 어머니!’하고 불러서, ‘그래 에미냐’ 대답이 들리면 가슴을 쓸어내렸죠.”
2003년 초 딸이 한의대에 합격한 직후 할머니가 타계했다. 걱정과 달리 시누이 두 분과 이씨까지 집에 있는 상황에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에 온 친척이 ‘자네는 부모한테 잘해서 복 받은 거’라고 했다.
원장 선생님이 침구치료를 마치고 가면 간호조무사인 숙희 쌤이 뒷처리를 맡는다. 침을 뺀 환부를 소독하는 이 씨. 붉은 빛은 적외선 치료광선이다.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이 씨가 한의원 구석구석을 구경시켜줬다. 모든 한약은 이곳에서 직접 다리는데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돼 있다고 한다.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일터에서 모녀는 서로 ‘원장선생님 ’ ‘숙희 쌤’이라고 부른다. 다른 4명의 간호조무사도 이름에 ‘쌤’을 붙여 부르기는 마찬가지.
20년 간 공사 현장에서 ‘설비 아지매’라 불리던 그가 ‘숙희 쌤’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권 원장이 한의사를 지망한 이유도 가족생각이 컸다.
“우선 우리 가족 건강을 제가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여기저기 아프고, 엄마는 40대부터 얼굴이 퉁퉁 붓고 잘 걷지도 못했어요.
수입도 생각했죠. 부모님 고생이 모두 돈 때문인데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우리 집에 좀 도움이 되겠다….물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보람도 크죠.
지금 엄마에게 월급 겸 용돈 겸 돈을 드릴 수 있어 너무 좋아요.”(권 원장)
-그렇게 고생했는데 가끔 남편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나요.
“제가 모자라 그 일을 택했는데 남편 탓할 입장이 아니죠. 솔직히 제가 잘났다면 그런 데 갔겠어요. 다른 거 했겠지.”
부인이 번듯한 직업을 가진 남편 동료들을 보면 이 씨는 남편에게 미안해했다. 그때마다 권씨는 “당신이 공부 더 했으면 나 못 만나. 날 만나줬겠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 말이 너무 고마워서, 그 어떤 일도 제가 다 이겨내야겠다는 책임감이 굳어지곤 했지요.”
시어머니를 중심으로 찍은 가족사진. 어머니는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셨지만 착하고 말이 없으셨다고 한다. 이숙희 씨 제공
가족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 엄마, 그 엄마의 마음을 아는 딸은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답을 찾는데 힘을 보탰다.
특히 평생 이씨를 가둬둔 학력 콤플렉스를 떨치고 세상에 나오도록 마음 썼다. 이씨가 수기를 통해 세상에 모든 걸 공개하겠다는 용기를 낸 것도 딸의 극약처방 덕이다.
“(수기 쓸 때) 처음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못 간 얘기는 빼고 고등학교 중심으로 썼어요. 남들 보기 창피하니까요. 그런데 딸이 막 뭐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다 넣었어요.”(이 씨)
엄마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었다는 얘기는 아들조차 수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한다.
“엄마의 경우 제 눈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학력은 별 의미가 없었어요.
엄마는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한번도 없어요.저희가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엄마는 함께 졸업한 셈이예요. 저희가 읽는 교과서, 참고서, 만화책, 제 전공서적까지 모두 읽었거든요.
화장실에 앉으면 신문조각이라도 읽으세요. 늘 조그마한 거 하나에도 배울 게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저희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지요.” (권 원장)
“고생은 누구나 하는 거고 본인 운명일 뿐이죠. 남탓할 필요 없어요. 그래서 더더욱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해요.
우리 남편은 그 상금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오는 데 큰 힘이 돼 줬어요. 그래서 10만 원 더해서 60만 원 줬고, 사위 딸 며느리 아들에게도 10만 원씩 딱딱 줬어요.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완성품이 될 수 있었다, 고맙다’고.”
이번엔 권씨에게 60만 원 받아서 뭐하셨냐고 하니 “딱 반 갈랐지”라며 킥킥 웃는다. 이 부부는 뭐든 생기면 즉시 절반으로 나눠 갖는다는 것.
68세, 64세인 부부는 모두 현역.이 씨는 한의원 일을 힘닿는데까지 계속할 생각이다. 남편 권 씨도 전기기사 자격으로 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먼길을 돌긴 했지만 건강한 가정을 일구고 자녀 잘 키우고 60세 넘어 자신의 이름으로 일하기 시작한 이씨.
그의 원동력은 본인의 간절함, 그리고 자신이 안간힘 다해 지켜낸 가족의 뜨거운 응원이었다. ‘굳세어라. 숙희야!’
어려운 일이 많아도 늘 ‘서로가 최고’라고 북돋으며 살아온 이숙희 권오언 부부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뒤에 권기순 원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보니 가족사진 느낌이 난다. 거제=서영아 기자sya@donga.com
거제=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