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8년 차 성우 최하리 씨 (하)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최하리 씨는 2017년 KBS 성우 42기로 공채 입사해 2018년 KBS라디오 연기대상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사진제공 최하리 성우
“우리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기쁨을 얻고,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려 애쓴다. 좋은 일에는 더불어 기뻐하고 슬픔은 반으로 나누어 가진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단요의 소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에서)
2017년 성우가 된 최하리 씨(33·본명 최정윤)는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KBS 전속 때부터 라디오 드라마 출연에 프로그램 진행도 맡았고, 이후 게임 ‘마비노기 영웅전’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 외화 ‘알라딘’ 등 수많은 작품에서 목소리를 선보였다. 이때까지 찍은 광고는 600편이 넘는다.
하리 씨의 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그에 따르면 KBS 입사 동기 10명 가운데 “문 닫고 들어온” 이가 자신이었다. 주눅들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들어올 땐 꼴찌였지만 나갈 땐 1등으로”란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결과 2018년 KBS라디오 연기대상 여자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듬해 프리랜서가 된 뒤엔 지금껏 3일 이상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스스로도 ‘악바리’라 부르는 하리 씨의 성우 생활을 상편에 이어 들어봤다.
(https://youtu.be/MYs8X4_3KUs?si=dNENBNMPL1JSuCep)
최하리 성우가 내레이션을 맡은 광고(4)
(https://youtu.be/drq6irgVvMQ?si=UPLq0uYxZ6VbYNBT)
서울 서초동 방배동에 있는 한 녹음스튜디오에서 만난 최하리 성우는 차분하면서도 상대방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하려 노력하는 청년이었다. 힘들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을 텐데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당연히 성우학원을 다녔어요. 목소리 자체가 작다 보니 처음 6개월은 호흡 발성 반에 있었어요. 저를 포함해 요즘 세대는 말을 크게 하지 않아 대부분 전달력이 떨어지는 편이라고 해요. ‘말하는 법’부터 다시 배운 셈이죠. 이후 입시 반으로 옮겨서 고시생처럼 살았어요. 회사마다 시험방식이 달라서 거기에 맞춰 준비해야 하거든요. 그간 나온 기출문제도 다 공부해야 하죠. 모든 일이 그렇지만, 그냥 뚝딱 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기왕 도전했으니 무조건 돼야 한다는 맘으로 최선을 다했죠.”
-합격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죠?”
-그래주면 좋지요.
“물론 기뻤지만, 내심 ‘아, 큰일 났다’ 싶었어요. 실은, KBS가 희망 회사 1순위는 아니었거든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을 좋아해서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을 노리고 있었어요. 전 변신소녀 같은 걸 연기하고 싶은데, 왠지 KBS는 그런 분위기가 아닐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취준생이 어디 맘대로 선택할 처지인가요. 뽑아준 것만도 감사하죠. 부모님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아무래도 어른들은 ‘이름 있는’ 회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군기(?) 같은 게 좀 센 편이죠. 정극이나 내레이션이 많은지라 진중한 일들도 많고요. 그래서 좀 의아하기도 했어요. 제가 봐도 전 그런 스타일이 아닌데, 왜 뽑았을까. 합격자 명단 순서도 의심스러웠어요. 나이나 가나다 순서도 아닌데, 제가 제일 마지막에 있더라고요. 한 관계자께 여쭤보니 ‘그거 성적순이야’라더군요. ‘아, 망했다’ 싶었죠.”
최하리 씨는 SK텔레콤 카스맥주 롯데 현대자동차 등 수많은 광고와 게임 애니메이션 등에 목소리로 출연해왔다. KBS 전속 기간에는 ‘생방송 주말 저녁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입니다’ 등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맡기도 했다. 사진제공 최하리 성우
-자신감이 떨어졌겠네요.
“근데 그런 거 생각할 틈도 없었어요. 당시 KBS가 파업 등으로 인력난이 심할 때라, 입사 며칠 되지도 않아서 라디오 진행을 덜컥 맡았어요. 적응 기간도 없이, 일이 쏟아져 들어오더라고요. 주말까지 일주일 내내 일한 적이 많을 정도였으니, 제 처지가 어떤지는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실전에 투입돼 뛰다 보니 나중엔 무슨 일을 시켜도 그리 겁이 나질 않더라고요. 돌이켜보면, KBS에 입사한 게 제겐 큰 도움이 된 거죠. 이후 성우로 자리 잡는데 큰 자산이자 밑바탕이 됐어요.”
-너무 열심히 일한 거 아닌가요.
“제가 입사를 꼴찌로 했잖아요. 문 닫고 들어오긴 했지만, 전속이 끝날 땐 당당하게 나가겠다고 맘먹었어요. 일이 벅찰 정도로 들어와도, 하나도 거절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다 했어요. 그 덕에 KBS 신인상도 받았죠. (꼴찌에서 1등이 된 거네요?) 1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뭔가를 뛰어넘은 기분이었어요. 성우란 길을 택했지만 제가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는 제 자신은 물론 누구도 모르잖아요. 힘들었지만 뭔가를 이겨낸 성취감 같은 거였죠.”
-스스로 채찍질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제 목표 중 하나가 ‘하나의 독립된 인간’이거든요. 경제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제대로 살아가는. 좀 추상적이지만, 어린 시절 왕따 사건 이후로 더 그런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실은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그때 기억이 많이 났어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중간에 다 포기하고 싶은 맘이 들기도 했거든요. ‘이대로 죽어버리면 날 괴롭히는 애들에게 복수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너무 분하고 억울했거든요. 하지만 그걸 버텨낸 그때의 저에게 칭찬을 건네고 싶어요. 요즘도 그런 일을 당하는 친구들이 많을 텐데,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이겨낼 기회가 생긴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미래는 분명 찾아오니까요.”
“그럼요. 누군가에겐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이젠 떳떳하게 제힘으로 일해서 먹고 사는 성인이 됐잖아요.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건 양면적인 거 같아요. 너무 그런 거에 기댈 필요도 없지만, 사회를 살아가는데 분명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어쨌든 전속이 끝난 뒤에도 성우로서 좋게 봐주시고 찾는 분들이 있다는 건 제가 이때까지 잘 못 살지 않았구나 하고 감사하게 되죠.”
애니메이션 ‘울려라! 유포니엄’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코사카 레이나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을 당시.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했던 최하리 씨가 프리랜서가 된 뒤 처음으로 맡은 주연 역할이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최하리 성우
“그럼요. 직장인에서 자영업자가 되는 거니까요. 연말정산도 그냥 회사에 맡기면 되는 거였는데,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죠. 뭣보다 홀로 경쟁해야 하고, 일에 대한 책임감도 막중하죠. 예를 들어, 어디에 소속돼 있을 땐 실수해도 혼 한 번 나고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프리랜서는 맘에 안 들면 다신 찾지 않으니까요. 물론 직장인이라고 왜 힘든 게 없겠어요. 장단점이 뚜렷해서 삶의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르다고 봐요.”
-벌이는 확실히 나아지겠죠.
“아무래도 그런 면은 있죠. 회사에서 받던 연봉보다야 더 잘 벌죠. 근데 이게 언제까지 갈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잖아요. 경력이 쌓인다고 일이 수월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실력 있는 선배들은 여전히 많고, 신선한 목소리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아 후배들과도 똑같이 경쟁해야 하고요. 특히 요즘은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대세이기 때문에, 성우도 트렌드나 흐름에 민감하죠.”
-자연스러운 목소리란 게 뭘까요.
“음…, 설명하기 어려운데, 특히 최근 광고계는 연기하지 않는 톤을 많이 요구해요. 아무래도 전문 성우들은 발성이나 어조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대신 다소 인위적인 느낌을 받으실 수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일반 직장인 같은 무경험자에게 광고 내레이션을 맡기는 경우도 꽤 있어요. 성우는 목소리로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 대가를 지불하면 거기에 맞춰드려야 하는 거죠. ‘성우처럼 말하지 않기’도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인 거예요.”
-역시 세상엔 쉬운 일이 없군요.
“물론이죠. 게다가 이런 작업들은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니까 변수가 많아서 조율이 무척 중요해요. 외화 더빙을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제작자부터 감독 및 스태프 하나하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 거죠. 현장에선 좋다고 마무리됐지만, 나중에 재녹음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요. 게다가 함께 작업한 이들은 좋아해도, 수요자들의 맘에도 들 거란 보장은 없는 거잖아요. 제 스스로 맘에 드는 연기를 했다고 다가 아닌 거예요.”
최하리 성우가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캐릭터들. 위는 애니메이션 ‘울려라! 유포니엄’의 코사카 레이나. 아래는 2010년 출시된 게임 ‘마비노기 영웅전’의 벨이란 캐릭터다. 사진제공 최하리 성우
“그렇죠. 제일 중요한 건 비염이나 기관지염에 걸리지 않는 거예요. 특히 작업 중에는, 목소리가 바뀌면 안 되니까요.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출연했는데, 1편과 3편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얼마나 이상하고 어색하겠어요. 코맹맹이 소리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죠.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중요하고요. 성우들끼리는 ‘연습은 안 하면 안 할수록 좋다’는 말도 많이 해요.”
-그건 왜 그런가요.
“일단 무리한 연습은 성대에 무리를 줄 수 있고요. 저희는 연습으로 정형화되는 목소리보단 현장에서 순발력 있게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광고 같은 경우엔 현장에서 바로 대본을 주고 ‘자, 갈게요’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스무 명이 넘는 스태프들이 일하고 있는데, 시간을 끌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글을 글로 보지 않는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좀 어려울 수 있는데, 그냥 읽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가장 적합한 뉘앙스와 흐름을 빨리 캐치해내야 하는 거죠.”
-잘 쉬는 것도 중요하겠네요.
“맞아요. 근데…, 저는 그걸 잘 못했어요. 2019년 프리랜서가 된 뒤로 이때까지 2박3일 여행 갔던 게 제일 길게 쉬어본 거예요. 빨리 자리 잡고 싶은 욕심도 컸지만,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제 사정만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작업인지라 그날 뭔가 진행돼야 하는 일이라면 제가 맘대로 쉬고 싶다고 할 순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6일 일하는 건 그냥 일상이 돼버렸네요. 요즘 들어 일과 휴식의 균형도 잘 찾아야 오래 갈 수 있단 생각이 많이 들어요.”
KBS 성우 42기 동기들. 김인형 김용 하지형 박주광 임주완 이지선 최하리 허예은 신온유 임희진. 2년의 전속 기간이 끝나고 프리랜서로 첫발을 내디딜 때쯤이라고 한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바쁘게 살고 있지만, 지금도 서로 생일을 챙겨주고 자주 모일 정도로 사이가 좋다. 영상제공 최하리 성우
“고마운 직업이죠. 시작은 엉겁결에 했지만, 되돌아봤을 때 후회되지 않거든요. 처음부터 성우란 일이 적성에 잘 맞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한테 ‘잘 맞는 일’로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어릴 때 첼로를 오래 배우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관뒀는데, 그땐 수긍이 가서 그랬던 건데 나중에 첼로한테 참 미안했어요. 진심으로 전력을 다하지 않고 그냥 어정쩡하게 떠나보낸 게 아닐까. 그래서 성우를 처음 시작했을 때 결심했어요. 이 일만큼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 모든 걸 쏟아부어 보자.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후회하지 말자.”
-인생의 목표가 ‘독립된 인격체’와 ‘행복하기’라고 했어요. 얼마나 이뤘나요.
“글쎄요, 아직 답을 내놓을 정도의 수준은 아닙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는 많이 독립을 이뤘고, 정신적으로도 이전보단 성숙했다고 보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겠죠? 그리고 두 가지 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는 문제니까요. 다만 부모님과 주위 분들 덕에 지금껏 잘 걸어왔고, 앞으로도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사회인으로서도 최대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거고요.”
-‘성우 최하리’의 꿈은 뭘까요.
“아주 짧은 한순간이라도, 누군가 제 목소리를 듣고 잠시라도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한 팬으로부터 ‘상처를 치유 받는 느낌이 들었다’는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것만큼 성우로서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전 제가 ‘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규정된 형태라고 정의내리기보단 어디서도 어디에도 두루두루 맞춰갈 수 있는. 그리고 하나 더, 세상 어디서나 구할 수 있지만, 목이 마른 이에게 물만큼 반갑고 필요한 건 없잖아요. 성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그런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최하리 씨가 보내준 두 번째 사진은 인천에서 장난꾸러기로 살던 초등학교 시절 동생과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야무진 표정이 눈에 띄는 하리 씨는 중학교 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꿋꿋이 이겨내고 고등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지냈다고 하네요. 사진제공 최하리 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