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이념이 제일 중요” “재정 다이어트해야” ‘건전 재정’ 방향 맞지만 이념 아닌 수단 돼야 ‘소주성’ 이념에 현실 꿰맞추려 했던 文 정부 실패도 ‘타산지석’ 삼아야
천광암 논설주간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입니다…우리 당은 이념보다는 실용이다 하는데 기본적으로 분명한 이런 철학과 방향성 없이 실용이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했던 말이다.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 환경과 야당의 후쿠시마 오염수 대응 등의 이슈도 거론됐지만 가장 큰 비중이 실린 내용은 경제였다.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 운영을 망하기 직전인 기업의 ‘화려한 껍데기’에 비유하면서, 건전한 재정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나랏빚을 늘리는 국채 발행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했다.
건전 재정을 윤석열 정부 경제 정책의 축으로 삼겠다는 것은 전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문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한국의 국가채무는 5년간 400조가 늘었고, 지난해 마침내 1000조 원을 넘어섰다. 미래세대를 빚더미 위에서 허우적대지 않도록 하려면 윤 대통령이 강조해온 것처럼 ‘재정 다이어트’가 꼭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 한국의 나라살림이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올해 400조 원의 세금(국세)이 걷힐 것이라는 기획재정부 전망을 믿고 여기에 맞춰 지출 계획을 짰다. 그런데 한 해가 4분의 3이나 지난 시점에 와서 기재부는 당초 예상했던 액수보다 59조 원 덜 걷힐 것 같다는 수정 전망을 내놨다. 역대 최대의 ‘세수(稅收) 펑크’다. 심각한 경제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세수 펑크가 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진 2020년 정도다.
당장 이 여파가 전 경제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정상적인 해법은 ‘국채 발행’이다. 일단 정부가 빚을 내서 급한 고비를 넘기는 방법이다. 경제부총리는 물론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까지 경제관료 출신들이 겹겹이 포진한 현 정부가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국채 발행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건전 재정과 국채 발행’ 문제를 타협 불가능한 ‘이념’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 정책 선택의 폭을 좁히는 족쇄가 돼버린 모양새다.
국채 발행 대신 현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세 가지다. 첫째 작년에 다 못 쓴 예산을 쓰는 것이다. 상식적인 방법인데 문제는 액수다. 기껏해야 6조 원밖에 안 된다. 두 번째 이미 편성된 예산을 쓰지 않는 것인데, 지금 같은 불경기에는 지나치면 약보다 독이 된다. 마지막으로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에 쌓여 있는 원화 중 20조 원을 정부 예산으로 끌어다 쓰는 방법이다.
외평기금 활용에 대해서는 일부 ‘묘수’라는 평가도 있다. 미시적으로만 보면 손해가 아니라 득이 되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외평기금이 환율이 불안할 때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쌓아 놓은 ‘방파제’라는 점이다.
물론 최악의 ‘세수 펑크’ 상황에서 빚을 내서 지출을 35조 원이나 늘리자는 식의 더불어민주당의 추경 주장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현 정부가 국채 발행을 꺼리는 데는 야당의 주장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전략도 깔려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외평기금 동원이라는 ‘위험한 불장난’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순 없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념에 현실과 통계를 억지로 꿰맞추려 하다가 임기 전반부를 완전히 허송하고 통계 조작 논란에까지 휩싸였다. 건전 재정과 국채 발행 여부가 정책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이념이 되면, 현 정부도 실패한 ‘소주성’의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