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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는 질문에 매달린 뮤지션이 ‘인생곡’을 만든다[차트 밖 K문화]

입력 | 2023-09-25 14:31:00


음원 TOP 100 차트인, TV 화제성 순위…. 매일 같이 쏟아지는 기사 제목입니다. 시선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 예술계도 성공의 기준은 꽤 명확한 편입니다. 그럼 당장 순위권에 없는 이들은 어떨까요? ‘차트 밖 K문화’는 알려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연재물입니다. 유치할지라도 대놓고 진지하게, 이 시대 예술가들의 철학을 소개합니다.
검버섯 핀 얼굴의 할아버지가 방바닥에 앉아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앉은키와 비슷한 어린아이를 향한다. 우뚝 서선 말갛게 눈을 뜨고 있는 아이에게, 할아버지는 장난감 안경을 가만히 건넨다.

앨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의 커버 사진. 허회경의 돌잔치 때 찍은 사진이다. 그는 “할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많지 않다”고 했다. 문화인 제공.


곡 ‘그렇게 살아가는 것’(2022년)의 앨범 커버다. 보기만 해도 뭉클해지는 이 사진은 기자에게 처음 ‘허회경’(25)이란 뮤지션을 알려준 존재다. 이 곡은 흔들리는 삶에 대한 진한 고민을 녹여낸 노래로, 허회경은 몰라도 여러 플레이리스트에 포함될 정도로 입소문을 탔다.

그에 대한 인상이 짙어진 때는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에서 열린 그의 첫 단독 공연 ‘나와 내 이웃에게’에서 허회경이 팬들의 사연을 읽는 시간이었다. “사소한 행복을 어떻게 느껴야 할까” 묻는 팬의 질문에 허회경은 무덤한 듯 말을 이었다. “5일간 머리를 감지 말아 봐라. 참고 참다가 머리를 감으면 그날은 진짜 행복할 것”이라고.

 지난달 26~27일 허회경은 서울 용산구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문화인 제공.


원숙한 곡에 엉뚱한 말조. 이 상반된 매력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걸까. 19일 서울 마포구 소속사에서 이뤄진 허회경과의 만남을 통해 이 의문이 풀렸다. 허회경은 “딱히 특별한 인생사는 없었다. 유달리 어른스럽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대신 그는 “쓸데없이 혼자 고민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말했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10년 뒤에 나 망하면 어쩌지?’
‘누군가가 나를 떠나면 어떡하지?’

이런 고민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정답이 없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굴었다”던 그는 “참 피곤하게도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둔중한 가사들은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 덕에 탄생할 수 있었다.

허회경은 작사 전 특정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고 했다. 곡 ‘김철수 씨 이야기’는 ‘슬퍼’라는 말이, 곡 ‘아무것도 상관없어’는 제목 자체가 시발점이 됐다. 문화인 제공.


앞서 언급한 곡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데뷔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허회경이 자신 있게 “인생곡”이라 꼽은 곡이다. 당시 허회경은 ‘왜 살아야 하는 걸까?’에 대해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막상 친구들을 만나면 행복했고, 집에 오면 극심하게 감상적인 사람이 됐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던 단어가 “돌고 도는 것들”이었다.

가시 같은 말을 내뱉고/날씨 같은 인생을 탓하고/또 사랑 같은 말을 다시 내뱉는 것/사랑 같은 말을 내뱉고/작은 일에 웃음 지어놓고선/또 상처 같은 말을 입에 담는 것

그의 가사에는 세상을 향한 애잔한 마음과 서늘한 시선이 뒤섞여 있다. 때때로 겁을 내고 질투도 하는 평범한 우리네를 노래한 곡 ‘김철수 씨 이야기’(2021년)도, 사사로운 일에 연연하지 않고 싶은 바람을 담은 데뷔곡 ‘아무것도 상관없어’(2021년)도 마찬가지다.

곡 ‘아무것도 상관없어’의 앨범 커버. 이 곡은 새벽에 즉흥적으로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리며 데뷔곡이 됐다.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려 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 어머니의 권유로 작곡을 시작했다. 문화인 제공.


누군가는 그의 곡을 두고 “우울할 때 들으면 기분이 나아지진 않지만 납득은 되는 노래”라고 했다. 이에 대해 허회경은 “제 노래를 듣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찝찝해지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본인도 마음이 편치 않은 콘텐츠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허회경은 “난폭하고 기괴해도 끝났을 때 남는 생각이 많은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다.

가출청소년들을 다룬 영화 ‘박화영’,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몬스터’, 고양이를 학대한 사람과 이를 추적하는 사람들을 찍은 다큐멘터리 ‘고양이는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등…. “저 사람은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를 곰곰이 고민해보는 것이 그에겐 세상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요즘 그가 꽂혀있는 단어는 ‘기억’과 ‘과거’다. 허회경은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고 되짚어야 미래가 나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인 제공.


허회경은 “삶에 대한 고민을 곡으로 풀 때 가장 해방감이 크다”고 말했지만, 미제 같은 질문들 앞에 가끔 권태로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때에도 창작을 계속하게 한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없다”는 의외의 답을 내놨다.


동력이 되는 건 없고요. 그냥 안 하다 보면 하고 싶어져요.

너무나 명백해서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 답이었다. 한때 음악에 권태를 느꼈던 그는 반년 넘게 작업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심연에 불안이 쌓여갈 때쯤 다시 악기 앞에 앉았고, 그때 그 쾌감을 기억할 뿐이다.

적극적으로 안 하다 보면, 되레 하고 싶어지는 것. 그에게는 삶과 음악에 대한 고민이 그랬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태도로 삶을 대하면서도 ‘쓸데없어 보이는’ 고민에 시간을 들이는 이유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도, 그렇지 못해도 매일매일 고민이나 사건사고는 이어지잖아요.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나?’ 생각해요.”

5일간 머리를 감지 않다 보면 감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는 여전히 인생을 고민한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