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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방의 투사가 된 인민군 대위…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가 걸어온 길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3-09-30 14:00:00


김성민 대표가 2019년 자유북한방송 녹음실에서 북한에 보낼 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이때 그는 항암치료 중이었다.

양강도 혜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기슭에 앉아 있던 인민군 대위가 별안간 강물에 뛰어들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던 시각이었다.

빨래를 하던 30명 남짓의 여인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가만히 보다가 대위가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자 한꺼번에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국경경비대가 달려 나와 온갖 욕설을 퍼붓더니 총을 쏘기 시작했다.

대위는 총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강을 건넜다. 추워서 이빨이 덜덜 떨렸다. 중국 땅에 접근하면서 그는 군복에 붙은 계급장을 뜯어버렸고 군모도 강에 던져넣었다.

중국 쪽은 45도 경사의 가파른 제방이었다. 미끄러워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조선족 청년이 머리를 내밀었다.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어디선가 나무 막대기를 찾아와 내밀었다. 1996년 9월 3일에 일어난 일이다.

나중에 이 청년은 탈북하는 인민군 군관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북한에 유인 납치돼 6개월 동안 고문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왔다.

그로부터 약 4년 뒤 휴전선 대북 심리전 확성기를 통해 절규하듯 외치는 목소리가 두 달 넘게 북한으로 퍼져갔다.

“나는 620훈련소 선전대 작가 대위 김진(김성민 씨의 개명 전 이름)이다. 620훈련소 정치위원, 선전부장 너희들은 무고한 전우를 반역자로 몰아가 결국 나를 남조선까지 오게 만들었다.”

확성기 방송이 시작된 뒤 북한군에선 비상이 걸렸다. 그로부터 다시 6년 뒤 그가 복무했던 부대에서 한 군관이 탈북해 왔다.

그 군관은 “그 사건 대단했죠. 소문이 퍼지자 총정치국에서 직접 김진 대위는 억울했다는 것을 부대에 통보했습니다”라고 전했다.

2006년 자유북한주간 행사로 워싱턴을 방문한 김성민 대표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대낮에 인민군 현직 군관이 압록강을 넘자 양강도 보위부에선 다음날 즉시 체포조를 장백에 파견했다.

체포조가 넘어오던 시각, 김 씨는 산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부대를 탈출해 꼬박 8일이나 기차를 타고 혜산으로 왔고, 다시 혜산에서 3일을 헤맸다. 온몸의 긴장이 강을 넘자마자 풀렸다. 하루 밤, 하루 낮을 자고 깨어나니 배가 고팠다. 태어나 네 끼를 처음 굶어봤다.

배가 고픈 그는 산 아래 십자가 불빛을 찾아갔다. 북한군 복무 시절에 읽었던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를 기억해냈던 것이다.

여성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를 보더니 대뜸 “어제 강 넘어온 분이죠. 오늘 북에서 체포조가 와서 인민군 군관 찾겠다고 돌아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고프고 지쳐서 어디 갈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집사는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먹고 나니 또 졸렸다. 교회의 작은 방에 들어가 쓰러졌는데 깨어보니 다음날 저녁이었다.

“여기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저랑 연길에 갑시다. 거기엔 도와줄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여집사와 함께 12시간을 달려 연길에 갔다. 1996년엔 도로에 검문이 없었다.

연길에서 한 조선족 목사를 만났다. 목사는 교회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다. 그로부터 6개월 남짓 그는 교회 안에서 먹고 자고 지냈다. 새벽기도를 오는 신도를 위해 아침마다 불을 피우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 교회에선 ‘월간조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작가 출신인 그는 탈북한 전 북한군 대위의 스토리를 스스로 써서 잡지사에 보냈다. 그가 보낸 기고문은 월간조선 1996년 10월과 12월호에 두 차례에 거쳐 실렸다. 각각 60만, 80만 원씩 원고료도 도착했다.

“당시엔 엄청난 돈이었는데, 아마 잡지사가 넉넉히 보내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걸 바꾸니 중국돈 6000위안, 8000위안이 됐는데, 당시 중국 노동자 월급이 2~300위안에 불과했거든요. 거액이 생긴 거죠.”

잡지 기고 후 적십자사 명함을 든 한국 남자가 찾아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아 거기에 가는 게 목표입니다. 일단 삼촌부터 찾아주면 생각해볼게요.”

적십자사 남자는 1000위안을 주고 가면서 기다려보라 했다. 하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2월 한국에서 백두산 견학을 가는 목사 일행이 교회에 도착했다. 김 씨는 이들에게 사정했다.

“저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한국으로 가려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500만 원이 있으면 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부산 동래제일교회에서 왔다는 조완주 목사가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조선족 현지 선교사에게 부탁해 일단 500만 원을 구해 그에게 준 것이다.

돈이 생기자 그는 돌봐주던 조선족 목사와 함께 대련으로 떠났다. 목사가 대련에 가면 500만 원을 받고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미국 국적의 한인 목사가 있다며 주선했기 때문이다.

2010년 제주도의 해변에 선 김 씨. 그에게 바다는 탈북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 공안에 넘겨준 한국 선장
1997년 2월 대련에 도착하니 풍채 좋은 한인 목사가 약속장소인 카페에 나타났다. 500만 원이 든 봉투를 넘기자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저 사람을 따라가면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말했다.

그날 밤 김 씨는 청년과 함께 택시를 타고 대련항으로 갔다. 항을 둘러싼 철조망 앞에서 청년이 “이제 철조망을 넘어 남조선 배를 찾은 뒤 거기에 몰래 올라가면 됩니다”고 말했다.

“아니 500만 원이나 받고 항에 데려와서 아무 배나 타고 가라는 게 말이 돼요?”

“저는 그 사람 잘 몰라요. 그냥 대련항에 데려가주면 2000위안 준다고 해서 심부름한 것뿐입니다.”

김 씨 머리에선 포기할까, 그냥 진입을 시도할까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청년을 잡고 사정했다.

“그럼 내가 들어가 남조선 배를 찾아볼 테니 제발 여기서 좀 기다려주시오. 난 중국말을 하나도 몰라서 어딜 갈 수도 없어요.”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철조망을 넘어 대련항에 들어갔다.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쪽으로 갈수록 불은 더 밝아졌다. 보초병의 눈을 피해 바닷물에까지 뛰어들며 끝까지 살펴봤지만, 선박들은 모두 영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그는 남조선 배를 끝내 찾지 못했다. 젖은 옷이 얼기 시작했다. 덜덜 떨며 다시 항구 밖으로 나오니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청년은 “아무래도 그 목사는 사기꾼 같으니 내가 천진에 사는 친구들을 통해 남조선 배를 찾아주겠다”고 했다.

김 씨는 청년과 함께 이번엔 천진으로 갔다. 조선족 청년은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천진항에 ‘후션프랜드’라는 남조선 광석 운반선이 들어와 있으니 밤에 그걸 타는 걸 돕겠다”고 했다. 김 씨는 다시 천진항으로 갔다.

청년이 “저기 끝에 있는 배가 남조선 배니 몰래 접근해 타라”고 알려주었다. 김 씨는 어둠을 타고 항에 들어가 몰래 선박에 접근했다. 그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공안이 세 명이나 뛰쳐나왔다. 김 씨는 배 선원인데 술을 마시러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공안은 배 선장을 불렀다.

선장이 나왔다. 김 씨는 선장에게 말했다.

“나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여기서 선장님이 선원이 아니라고 하면, 저는 공안에 끌려가 북송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공안의 앞이라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선장의 말 한마디에 그의 생사가 달린 순간이었다.

선장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이것 보시오. 탈북자를 도와주면 우린 공안이고 안기부고 다 끌려다녀야 해요. 우리도 먹고 살자고 일을 하는데 도울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김 씨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선장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리 말하면 난 죽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선장은 단호하게 “노”를 외쳤다. 공안에게 “노스코리아 아미”라며 잡아가라고 손짓했다. 공안들이 달려들어 김 씨에게 수갑을 채웠다.

나중에 한국에 온 뒤 김 씨는 그 선박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런데 후션프랜드라는 선박을 찾지 못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다짐했던 복수의 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졌다.

2009년 마잉주 당시 대만 총통이 김성민 대표에게 ‘2009년 아시아 민주인권상’을 수여했다.



●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쁘냐?”
천진 감옥에 끌려간 그는 통역을 구하지 못해 40일이나 수감돼 있었다. 나중에 김일성대에 유학을 다녀왔다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한국말을 너무 못해 겨우 의사소통을 했다.

“저는 인민군 군관입니다. 중국에 정치망명을 하겠습니다”고 하자 여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우린 그딴 거 몰라”고 대답했다. 1차 조사를 받은 그는 도문 변방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를 이송하는데 무려 7명이 호송원으로 따라왔다.

도문에서 다시 조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조사관이 2명씩 계속 바뀌었다. 조선족 공안이 그에게 회유를 했다.

“너 가면 죽는다. 우린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북에 보내지 않고 중국에 있는 ‘로개농장(로동개조농장)’으로 보내겠다.”

북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김 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루는 새로 나타난 조사관이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왔다”는 그의 답변을 듣고 “그럼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김 씨는 북한 체제를 맹비난했다.

9일째 되는 날 조사를 받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여럿이 달라붙어 그의 팔을 꺾고 수갑을 채운 뒤 봉고차에 실었다. 차 안에서 처음 보는 탈북 남성과 수갑을 한 쪽씩 나눠차고 짐짝처럼 구겨진 채 북한으로 호송됐다. 현직 군관으로 탈북한 그는 북에 돌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의 심정을 그때 알 수 있었다.

함경북도 남양의 국경다리를 건너 도착하자마자 중국 공안이 두 사람을 북한 보위부에 인계했다. 중국에서 차고 온 반짝반짝한 새 수갑이 풀리고, 피로 변색된 듯한 시꺼먼 북한 수갑이 덜커덩 채워졌다. 중국 쪽에서 남양을 바라보면 국경다리 바로 앞에 ‘영생탑’이란 것이 있다. 보위부에선 두 사람을 그 탑 주변을 돌게 했다. 주변에서 장사하던 아줌마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을 조국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침을 뱉고 신발을 집어던졌다. 죽음을 앞둔 순간임에도 그는 이때 인생 최고의 수치심을 느꼈다.

영생탑을 돌게 한 보위부원들은 다시 이들을 싣고 온성 보위부로 끌고 갔다. 김 씨는 중국이 자신에 대한 자료를 북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산악기공장 노동자라고 열심히 거짓말을 했다. 처음에는 보위부가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듯했다.

온성 보위부에서 조사 7일째 되는 날 조사실에 들어간 그는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조사관은 도문에서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북한 보위부가 중국에 건너와 직접 탈북민의 심문에 동참했던 것이었다. 중국에서 북한 체제를 비난했던 그의 답변이 고스란히 북한 보위부 책상에 올라와 있었다. 사형 당해야 할 이유가 추가된 것이다.

다음날 군관 4명이 온성에 나타났다. 그가 복무했던 부대와 인민무력부 소속 보위사령부 군관들이었다.

“김진. 이제 가야지. 우선 평양에서 조사를 받고, 다시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을 거야.”

“조사가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임마, 그건 네가 판단해야지 우리가 어케 알갔어?”

2007년 캐나다에서 열린 북한구원기도운동 행사에 참가한 김 씨가 북한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호송원 4명과 함께 그는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사람들로 빼곡한 일반 객실이 아닌 열차 호송원과 승무원들이 타는 특별 객실이었다. 기차는 느릿느릿 평양을 향해 가고 또 갔다. 4명이 돌아가며 감시하는 바람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가는 내내 그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희망은 있었다. 천진감옥과 도문감옥에서 50일 넘게 수갑을 차고 수감생활을 하다보니 고무줄이 들어있는 속옷 혼솔 부분의 살이 온통 벌레에 물어뜯겨 피고름 투성이었다. 도저히 수갑을 찰 지경이 아니어서 호송원들은 솜옷 위에 수갑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손을 살살 움직이면 수갑에서 손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이 지났다. 깊은 밤 창밖을 내다보니 기차는 평성을 지나 평양으로 달리고 있었다. 평양에 도착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

그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화장실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더럽기 그지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 서있던 호송원은 냄새가 싫은지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김 씨는 3일 동안 머리 속으로 연습한대로 수갑에서 한쪽 손목을 뽑아냈다.

동시에 벌떡 일어나 유리창을 발로 차 깨뜨린 뒤 시속 80㎞ 정도로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차피 평양에 가서 온갖 고통을 겪다가 죽을 운명이라면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100m에 하나씩 있는 열차 전봇대만 피하면 살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호송원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몸을 던진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로 옆 작은 밭에 쓰러져 있었다. 봄을 앞두고 마침 밭을 갈아서 땅이 푹신했다. 3년간의 특수부대 훈련이 무의식중에 그를 땅에 제대로 착지시킨 듯싶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멀리 기차가 멈춰서 있었고, 수십 개의 손전등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움직여지지 않아 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로에 있다간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기 시작했다. 마침 수십m 옆에 산이 있었다. 그가 산자락에 붙어 몇 미터 올라가지 않았을 때 선두의 손전등이 그가 뛰어내린 자리에 도착했다. 자세히 보면 사람이 쓰러졌던 자리나 깨어진 유리창을 발견할 수도 있었겠지만, 열차에서 뛰어내린 호송원들과 안전원, 경무원(헌병)들도 당황했는지 정신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

손전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김 씨는 다시 산을 기어올랐다. 몇 시간 뒤 산중턱에서 바라보니 손전등들은 주변 마을 집집마다 분주히 오가며 돌아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추운 산등성이에서 김 씨는 탈영병으로, 조국 배반자로, 사형수로 전락한 자신의 운명을 처량하게 되돌아봤다.

2008년 국경없는 기자회가 수여한 상을 수상한 김성민 대표(왼쪽).



● 남조선 혁명시를 쓴 아버지
김 씨는 1962년 자강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는 평양에서 희천공작기계공장 노동자로 혁명화 대상이 됐던 신세였다.

아버지 김순석은 북한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었다. 해방 후 함경북도 작가동맹 지부장을 역임한 그는 북한 최고 권위의 문학잡지에 여러 편의 시를 실었고, 이것이 인정받으면서 평양창작실 작가로 발탁됐다. 6·25전쟁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했고, 전후엔 잡지 ‘조선문학’ 편집부장, 조선작가동맹 시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 종파 숙청 바람이 불 때 아버지도 좌천돼 노동자로 지방에 쫓겨났다. 어떤 이유였는지 김 씨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에 할머니가 맏이이자 청년이 된 아버지만 함경북도 청진에 남겨둔 채 김 씨에겐 삼촌인,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서울로 간 것이 좌천의 중요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10대의 어린 두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고 떠난 것뿐이지만, 북한 당국은 월남자로 판단한 것이다.

수년 간의 혁명화 끝에 아버지는 1964년에 김일성대 어문학부 교원으로 평양에 복직했다. 김 씨는 희천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평양 중구역에서 북한 최고의 명문 유치원으로 치는 경상유치원과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세상을 떴다. 김일성대 교원을 하던 아버지는 김정일이 1970년대 초반 대남사업을 하겠다며 ‘3호 청사(노동당 대남담당 기관만 모아놓은 건물 명칭)’를 만들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갔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구국전선 등 남조선 지하조직의 작가가 쓴 것처럼 시를 지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쓴 시는 ‘남조선 혁명가들이 보내온 시’로 둔갑돼 대남방송으로 나갔다. 나중에 김 씨는 아버지가 썼던 시를 찾아봤다. 서울로 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구절구절 역력했다. 아버지는 이 일을 얼마하지 못했다. 김 씨가 12살 때인 1974년에 타고 가던 차가 평양의 한 고가다리에서 전복돼 세상을 뜬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쓰러져 누웠다. 어머니는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국제연감 담당 기자였는데,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계속 누워만 있다가 1년 뒤 돌아갔다. 김 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살기 싫어 자살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외아들인 김 씨는 출가하지 않은 막내 누나와 함께 살았다.


● ‘창작조 병사’가 되다
1978년 중학교를 마친 김 씨는 만 16세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부모를 잃고 빽도 없는 그는 황해남도 태탄군에 주둔한 28사 경보병대대에 배속됐다. 경보병대대는 북한에서 특수부대로 간주된다. 게다가 그가 입대했을 때 “일반 병사도 벽돌 한 장은 거뜬히 깨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

경보병대대는 아침 기상 직후부터 내복바람으로 3000번 타격 훈련을 한 뒤 밥을 먹었다. 엄동설한 산골짜기로 타고 내리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타격 훈련을 하다보면 손에서 흐르던 피고름이 얼음이 돼 달라붙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24㎏짜리 군장을 메고 평일 50리(20㎞), 토요일은 100리(40㎞)씩 행군 훈련을 했다.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김 씨는 인민군 협주단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제자들에게 부대를 좀 옮기게 해달라고 거듭 사정했다.

3년 만에 마침내 김 씨는 경보병대대에서 82미리 박격포부대로 이동됐다. 포부대의 삶은 경보병부대에 비해선 천국이었다.

여유를 찾은 그는 짬짬이 시를 써서 인민군 신문사에 기고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시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신문사에 약 10편의 시를 기고하면 1편은 신문에 실렸다. 5편 정도 실렸을 때 인민군 신문사에서 어떤 병사인지 궁금해 기자가 찾아왔다. 사단에서도 그를 주목했다. 입대 4년차가 됐을 때 사단 선전부장이 찾더니 “사단 창작조에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이곳에서 1년 정도 활동하다가 입대 5년차엔 군단 선전대로 옮겨갔다. 북한군은 군단별로 정규 선전대를 운영한다. 그가 속한 4군단 선전대는 당시 120명 편제였는데 200명이나 근무했다. 대좌인 선전대장 산하에 문학창작조는 물론 성악, 기악, 화술, 무용, 조명 등 각 분야별 특기자들이 소속돼 있었다. 군단 선전대에 소속되면 군관들이 입는 군복을 입히는데, 선전대를 구분하는 견장도 따로 있었다. 먹는 것도 일반 군부대와 훨씬 나아서 배고픈 걱정이 없었다. 그가 속한 문학창작조는 소좌 편제의 작가 밑에 8~10명의 병사가 소속돼 있었다.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선전대의 가장 큰 목표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군무자축전과, 역시 4년 주기로 열리는 군단별 선전대축전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이다.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축전을 위해 군인 200명이 복무하는 것이다.

가령 군무자 축전의 경우 23개 군단급 선전대(정규군단 12개, 공군, 해군 및 군단급 훈련소 포함)에서 고른 작품들로 2시간 반짜리 공연을 진행하는데, 군단에서 작품이 하나라도 뽑히면 우수한 성과를 냈다고 본다. 각 군단 선전대는 성악이나 기악은 물론 합창이야기, 합창과 시, 노래이야기, 중창이야기, 독연 등 다양한 장르를 내놓고 최종적으로 공연에 선정되기 위해 애쓴다.

김 씨는 군단 선전대에 들어간 첫 해부터 전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병사의 자서전’ ‘중대의 기타수’라는 제목으로 그가 쓴 가사가 군무자축전에 오른 것. 김 씨는 “가수가 노래를 잘 불렀던 탓이 컸다”고 회상했지만, 23개 군단 작가들이 경쟁하는 자리에 일반 병사가 쓴 가사가 두 개나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중앙 축전에 올라가면 “김진이 너냐”는 질문을 받게 됐다.

창작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책이었다. 북한에서 발간된 고리타분한 서적밖에 없었는데, 외국 명작도 보고 싶었다.

한 번은 창작조 병사 한 명이 “해주도서관에 가면 과거 출판됐다가 회수했던 책을 한 부씩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는 정보를 갖고 왔다. 그에게 시간을 주니 도서관에 들어가 1950~60년대 출판됐다가 김일성 독재체제가 공고화되면서 회수한 뒤 한 부씩 남겨 창고에 두었던 금서를 무려 6마대나 훔쳐왔다.

그 덕에 김 씨는 안나 카레리나, 레미제라블 등 세계 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세계 명작 중 일부를 다시 출판했지만 당시엔 이런 책이 금서였다.

자유북한방송은 북한의 비밀자료들을 입수해 북한 실정을 고발한다.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는 이런 북한 지시문들이 북한 정보원들을 통해 수시로 들어온다.



● 김형직사범대학에 가다
입대 7년차가 되자 김 씨는 창작조 조장으로 발탁됐다. 조장이 되니 1년에 6개월씩 평양시 송신구역에 있는 인민군창작실에 올라가 ‘창작조장 강습’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입대 8년차인 1986년에 그는 송신에 갔다. 전군에서 온 30명의 군단 창작조장이 모였는데, 그해와 이듬해 그는 이 창작조장 강습단의 조장으로 발탁됐다. 이때 그는 북한 체제의 부조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됐다.

저녁이 되면 30명 중 20명이 넘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평양의 고위 간부집 자식들이었다. 창작실 군관들은 이들에게 ‘과제’를 주어 외출을 허용했다. 가령 정무원 무역부장의 아들은 6개월 내내 며칠에 한 번씩 식용유 통을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이 기름은 군관들과 군관 식당에 배정됐다. 무역부장 아들은 기름통만 전달하고 집으로 귀가했다.

군관 결혼식 준비 임무 명목으로 나가는 병사, 쌀을 갖고 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가는 병사, 부식물을 해결하라는 과제를 받고 나가는 병사 등 사유는 다양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평양 간부집 자식들은 뇌물을 주고 군 복무 기간을 집에서 자유롭게 지냈다.

김 씨도 집이 평양이지만, 부모가 없어 물자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와 몇 명만이 실력으로 창작조장으로 발탁됐을 뿐 나머지는 뇌물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그런 김 씨도 군 생활 말년에 뇌물을 엄청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김정일이 군단 산하 선전대와 체육단이 혼자만 잘 산다고 화를 내면서 해산하라고 한 것. 물론 이 지시는 3년쯤 지나 번복되긴 했다.

선전대가 해산되면서 그는 박격포부대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가니 중대에선 그가 가장 고참이었다. 중대장과 소대장도 그보다 늦게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못하고 어려워하자 대대장이 그를 불러 “지금 너 하나 때문에 부대 규율이 어지러워지니 무력부 감 밭에 가서 경비나 서라”고 지시했다.

황해남도 용연군에는 인민무력부 호방총국이 소유한 무려 2만 정보 면적의 감나무 밭이 있었다. 경비 움막에 올라가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몇 병사들과 감 경비를 서게 된 김 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게 됐다. 규율생활도 없는데다, 감을 따서 고기와 실컷 바꾸어 먹을 수가 있었다. 안면을 익힌 인민군 창작실에 감을 한 트럭 가득 따서 보내도 흔적도 나지 않았다. 북한에선 귀한 과일인 감으로 창작실에 계속 뇌물을 보내니, 창작실이 보답을 했다.

인민군 창작실은 3년에 한번씩 김형직사범대학에 위탁생을 모집해 보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위탁생은 기존 신분은 유지한 채 대학에 파견하는 학생을 의미하는데, 졸업하면 파견한 조직으로 돌아가야 한다.

1988년 10년차를 맞아 제대할 나이가 된 김 씨는 인민군 전체에서 3명을 뽑는 김형직사대 작가양성반 위탁생으로 발탁됐다. 인민군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부, 보위부, 각도 문학창작실, 중앙 영화문학 창작실 등에서 위탁생을 뽑는데 이들은 한 개 학급을 구성해 3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한 뒤 졸업장과 작가 자격증을 받고 파견 기관으로 돌아간다.

그가 입학했을 때 이렇게 모집된 위탁생은 19명이었다. 작가동맹 문예창작실 실장 정열(대좌)이 창작지도 교수였고 노동당 작전부장 오극렬의 딸로, 북한에선 유명한 영화문학 작가로 알려진 오혜영도 교수진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2019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기일인 10월 10일을 맞아 그의 묘소를 방문한 김 대표. 김 대표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황 전 비서의 묘소를 매년 빠지지 않고 찾고 있다.



● 군단 작가, 대위로 승진
김 씨는 대학을 1년 반밖에 다니지 못했다. 새로 생긴 620훈련소에서 작가를 뽑으려고 수소문하다가 학생 신분인 김 씨에게 제안을 해왔다. 소위를 달고 훈련소 작가로 일하면 3년 뒤에 졸업증을 받아주겠다고 한 것. 김 씨의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
황해북도 신계군에 지휘부를 둔 620훈련소는 항간에 자주포군단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말에 생겼는데, 이때만 해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군단이라며 비밀주의를 고수했다.
김 씨는 제안에 선뜻 응했다. 사실 병사 시절 그의 꿈은 군관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군관학교에 잘만 가는데, 그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추천해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안쓰러웠는지, 제대 전 뇌물을 주어 친분이 두터워진 군단 간부지도원이 부르더니 책상에 서류를 두고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웠다.
서류를 펼쳐본 김 씨는 아연실색했다.
‘할아버지 일제 때 뽕밭 4000평 보유, 도박으로 탕진. 삼촌 2명 월남. 아버지 기독교 신우회 총무 출신. 어머니 일본군 나남헌병대 타자수’ 등 그의 가족 내역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북한에서 나서 자란 김 씨가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간부지도원은 그에게 알아서 단념하라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일본군 경력이 가장 걸렸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의 지인들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돼 나남헌병대 타자수를 하게 됐나요?”
돌아온 대답은 허무했다.
“진이야, 중앙당이나 군단에 가면 예쁜 여자들이 근무하는 걸 많이 봤지? 딴 이유는 없어. 너희 엄마가 처녀 때 청진에서 제일 예뻤어.”
군관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던 김 씨에게 군단 선전대 작가 제안이 왔으니 대학을 더 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가 군단에 가니 작곡가, 연출가 등을 각 부대에서 스카웃하면서 선전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1996년 9월 탈북할 때까지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군복을 입을 사이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을 썼다.
장성인 훈련소 정치위원은 북한에서 유명한 구호인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를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인데, 수시로 창작실을 찾아왔다. 당을 찬양하는 척하면서 자기를 부각시키는 내용을 교묘하게 끼워넣는 작품을 만드느라 1년 반 넘게 함께 고생했고, 친분도 두터워졌다.
원래 군단 작가 편제가 소좌라 진급도 빨랐다. 소위로 부임했지만 대위까지 거침이 없었다. 1991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김일성에게서 군권을 넘겨받은 김정일은 그해 모든 군인의 계급을 한 계급씩 올려주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중위로 승진하기도 했다. 약속대로 김형직사대에선 졸업 학년이 되자 졸업장도 주었다.

한국에 입국한 이듬해인 2000년, 38세 젊은 시절의 김성민 대표.



● 한국에서 날아온 편지
김 씨는 1996년 8월까지 탈북이란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과거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겹치면서 탈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첫 번째 사건은 1994년에 있었다. 그의 휘하 창작실에 두만강 옆 함북 새별(경원군)이 고향인 병사가 있었다. 이 병사가 휴가로 집에 다녀오면서 떡을 가득 메고 왔다. 그런데 떡을 싼 종이가 북한에선 볼 수 없는 고급 종이였다. 자세히 보니 ‘월간조선’의 화보였는데, 거기에 ‘사람찾기란’이 있었다. 병사에게 물어보니 중국에 있는 친척이 뭘 포장해 보낸 종이인데, 종이가 좋아 떡을 포장해 왔다는 것이었다.

김 씨는 갑자기 삼촌을 찾고 싶었다. 1980년대 초반 북한이 남조선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호소문 명단에 삼촌과 같은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병사에게 “중국 친척에게 이 주소로 사람찾기를 부탁할 수 있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했다. 김 씨는 삼촌 2명의 인적사항을 적어 병사에게 주었다. 특히 노동신문에 나왔던 삼촌 이름과 같은 사람은 모 기독교 단체 총무 목사인 것 같은데, 알아봐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몇 달이 지나 병사가 중국 친척을 통해 월간조선이 보낸 회답을 갖고 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김관○ 목사는 알아보니 당신의 삼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병사가 보위부에 포섭된 스파이였다. 병사는 김 씨가 준 편지와 회답을 고스란히 보위부에 가져다주었다. 현직 군관이 한국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는 매우 중대한 범죄였다.

보위부 조사가 시작되던 찰나 군단 정치위원이 나섰다. 자기를 홍보하는 작품을 한창 만들고 있는 작가를 굳이 잡혀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김 씨를 불러 “뭐, 내용을 보니 별 것도 아니던데 내가 잘 처리해줄거니 창작에만 집중하라. 이제부터 이 일은 당신과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했다. 군단 정치위원이 힘을 쓴 덕에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두 번째 사건은 1993년에 시작됐다. 당시 군단의 신생 선전대의 고민은 관악기가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북한제 관악기를 들고 축전에 올라가면 외제 악기를 쓰는 다른 군단의 선전대에 계속 밀렸다. 군단 선전부에 외화벌이를 한 돈으로 관악기를 좀 구해달라고 계속 요구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1993년 축전을 앞두고 선전대장은 이 문제를 두고 계속 속을 썩였다. 하루는 선전대장이 김 씨를 불렀다. 당시 김 씨는 선전대 노동당 세포비서를 맡고 있었다.

“비서 동무, 우리가 알아보니 개성학생소년궁전에 재일교포가 기증한 악기 세트가 쓰지도 않고 보관돼 있다고 하오. 우리 이거 훔친다 생각 말고, 잠깐 빌리고 다시 갖다 준다는 마음으로 가져오면 안 될까.”

“대장 동지가 알아서 하시죠.”

비서와 상의를 마친 선전대장은 때마침 선전대에서 아코디언 강습을 받고 있던 포종심정찰 대대 강습생 5명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인솔해 석탄트럭을 타고 수백 리 떨어진 개성으로 떠났다.

침투와 기습 훈련에 특화된 정찰병들은 이틀 만에 새까만 석탄더미에 악기를 숨겨 부대로 돌아왔다. 나팔은 물론, 일본산 드럼세트와 전자바이올린 등 없는 것이 없었다.

훔쳐온 일제 악기로 그해 선전대는 군무자축전에서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시 가져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악기에 대해 물어보면 외화벌이를 한 자금으로 사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1996년에 이 사실이 발각됐다. 누군가 군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낸 것이다. 군단 선전대장은 출당된 뒤 강제 제대됐다. 훔쳐온 악기를 사용한 작곡가는 당원 자격이 박탈당하고 후보당원으로 강등됐다. 김 씨는 이 사건에 가담한 적이 없어 처벌을 피했다. 두 지휘관이 처벌을 받으면서 세 번째로 직급이 높았던 김 씨가 선전대장 대리를 맡았다.

이때부터 부대에 김 씨가 대장이 되려고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졸지에 그는 출세를 위해 조직과 동료를 배신한 사람이 돼버렸다.

황장엽 전 비서는 김 대표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다. 첫 번째는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으로 와달라는 요청 편지이고, 두번째는 자신의 글을 다듬어 달라고 보낸 편지다.



● 탈영, 그리고 탈북
김 씨는 처음에 자신이 배신자로 지목된 줄 몰랐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외면하고 피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받았다.

마침내 그는 부하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됐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군단 정치위원이라면 억울한 심정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군단 지휘부에 가니 보초병들이 정치위원의 명령이라며 정문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는 담장을 뛰어넘어 보초병들의 눈을 피해 정치위원 방으로 찾아갔다.

그가 억울하다고 토로하자 정치위원이 “너 아니면 됐어, 가봐. 일 열심히 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자루 속의 송곳이야 언제든지 드러나지 않겠어.”

방을 나오면서 그는 정치위원도 자신을 배신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총정치국이라도 시원하게 투서를 누가 했는지 밝혔으면 좋으련만, 북한도 제보자의 신상은 나름 보호해 준다.

선전대로 돌아온 그는 이 누명을 어떻게 벗을지 고민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샜다. 그러다가 친구인 여단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던졌다.

“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 남조선에 편지를 쓴 적이 있다면서?”

순간 김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편지 사건은 친구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위원 등 몇 명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상관을 배신한 사람으로 지목되자 정치위원도 그를 제거하려 약점을 꺼내든 것이다. 이때는 정치위원을 띄우는 작품 창작도 끝난 뒤라, 김 씨의 활용도도 사라졌다.

친구에게서 편지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 씨는 방으로 돌아왔다. 남조선에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다시 들추면 정치범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이럴 바엔 남조선으로 가자.”

그는 지도를 펼쳤다. 철도를 따라가 보니 양강도 혜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간단히 짐을 챙겨 부대를 빠져나와 기차에 올랐다. 1996년은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가 마비됐던 때라 기차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열차 안에서 8일이나 고생한 끝에 혜산에 내렸다.

혜산역에 내렸지만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몰랐다. 군관복을 입고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면 수상하게 볼 것이 뻔한 터라 그는 무작정 헤맸다. 그런데 하필 방향이 반대였다. 무려 3일이나 헤매다가 압록강에 도착했다. 나중에 보니 혜산역에서 강까지는 5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압록강 기슭에 앉아 그는 하염없이 중국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되면 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변수가 생겼다. 지나가던 국경경비대 두 명이 다가와 증명서를 보자고 했다. 군관이 오전부터 강가에 목석처럼 앉아있으니 수상해보였던 것이다.

증명서를 받아본 한 군인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

“820훈련소 김진 작가 동지군요. 저는 인민군 신문으로 통해 작가 동지 잘 압니다. 심지어 대위 동지에게 편지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작품 하나 쓰려고 현장 답사 왔어.”

상대는 기뻐서 주절거렸지만, 신분을 들킨 김 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들이 부대로 가서 보고하면 체포조가 올 가능성이 컸다. 군인들이 헤어져 얼마쯤 갔을 때 그는 압록강에 뛰어들었다.


● 수배를 피한 9일간의 탈출
북송돼 평양으로 끌려가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한 김 씨는 산에서 하루를 더 은신해 있다가 주변 기차역을 찾아갔다. 그런데 벌써 기차역에 그의 수배 사진이 붙어있었다.

그는 다시 돌아가 숨어 있다가 밤 12시에 담장을 넘어 역에 몰래 들어갔다. 북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잡아타고 가다가 새벽이면 무조건 내려 주변에 은신하고 다시 밤마다 화물열차를 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렇게 9일 동안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중국에서 겨울에 옷을 여러 벌 입고 있다 잡혔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호송될 때까지 그 옷들을 여전히 입고 있었는데, 그는 탈출 후에 옷을 한 벌씩 기차역 앞 상인들에게 넘겨주고 먹을 것과 바꾸었다.

때는 1997년 3월 말이었다. 낮에 산에 은신해 있다보면 산나물 캐려 올라오는 남루한 사람들, 나물이라도 캐먹고 살려고 산 밑에 비닐로 대충 막사를 만들고 사는 가족들을 수없이 만나게 됐다.

지금까지 부대 밖 세상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김 씨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 나라는 망했구나. 이런 걸 내가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했고, 찬양을 하다니”라고 수없이 자책했다.

9일째 되는 날 기차 옆에 두만강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날은 날이 밝아도 계속 기차를 타고 갔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9시쯤 되자 함북 회령과 학포 사이 구간을 가던 기차가 고개에서 속도가 급격하게 늦춰졌다.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논밭을 가로 질러 두만강을 향해 달렸다. 민가나 도로와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그런지 막아서는 경비대도 없었다.

아직 두만강은 3분의 1 정도 얼어있었다. 그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흙탕물로 변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쑥 들어갈 것이란 예상을 했는데 의외로 물이 무릎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냅다 뛰어 중국땅에 도착한 그는 갈대밭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중국에 다시 온 것이다.

아는 곳이 지난번 머물던 연길의 교회인지라 그곳을 찾아갔다. 대련까지 안내해주었던 태중원 목사는 그가 남조선에 이미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에 잡혀갔다 왔다고 해도 믿지 않고, 안기부에서 다시 임무를 받고 왔냐고 물었다.

1998년 봄 중국에 살던 김성민 대표가 자신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건넜던 두만강의 탈북 현장을 다시 찾았다. 강 건너가 북한이다.



● 연길에서 올린 결혼식
연길에서 김 씨는 1999년 2월 한국에 올 때까지 계속 머물렀다. 연길에 오자마자 그는 사기꾼 목사를 수소문했다. 그가 베이징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목사는 “네가 목사냐”고 울부짖는 그를 보고도 침착한 목소리로 “정말 미안합니다. 목사도 사람이라 실수합니다”고 하며 500만 원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그 목사는 속죄한다며 탈북민 구출활동에 뛰어들었고 수십 명의 탈북민을 한국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이 요원을 보내 그를 납치한 뒤 살해했다.

김 씨는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란 말만 되풀이해 들었다.

연길에 있을 때 가장 큰 변화는 그를 보호해주던 태중원 목사의 처제와 결혼을 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연변병원 의사로 있었는데, 아프리카 선교사가 꿈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는 김 씨를 남편으로 선택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지만 그녀는 이 남자를 보호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

사람을 좋아하는 김 씨는 한국에 온 뒤에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집에 끌고 왔다. 명절이면 주변 탈북민들을 다 불러 모으는 바람에 집이 넘쳐나 아파트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앉아 고기를 굽기도 했다. 김 씨의 집을 거쳐 간 탈북민은 수없이 많은데, 그때마다 부인은 불평 없이 남편과 손님들에게 상을 차린다. 탈북민 사회에서 김 씨 부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해먹인 사람은 없다.

그는 한국에 와서 20년 넘게 살면서 자기 집도 마련하지 못하고, 돈이 생기면 계속 엉뚱한데 써버리는 남편이지만 지금도 김 씨와 뜻을 같이하며 믿음직하게 곁을 지킨다. 이들은 부부가 아닌 동지가 된지 이미 오래다. 연길에서 태어난 딸은 벌써 20대 중반이 넘었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연길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태중원 목사는 탈북민을 도와줬다는 죄로 박해를 받아 외국으로 망명했다.

결혼하고 얼마쯤 지나 김 씨는 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았다. 연길에 있는 내내 여러 선을 통해 수없이 알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백두산 관광을 왔다가 교회에 들린 한국 사업가가 자신이 알아본다며 돌아가더니 3일 만에 찾았다고 연락을 해왔다. 한국에 사는 할머니와 작은 삼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큰 삼촌 한 명만 남아있었다. 둘은 통화를 하면서 금방 서로를 알아봤다. 큰 삼촌의 목소리가 아버지와 똑같았다.

삼촌은 성공한 사업가가 돼 있었고, 자식들 또한 잘 나갔다. 조카가 왔다는 소식에 삼촌은 연길로 날아왔다. 처음 봤지만 보자마자 “형님 아들이 맞구나”고 부둥켜안았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

삼촌은 몇 만 달러를 주고 갔다. 당시 연길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김 씨는 이 돈 일부로 중국 호구를 사서 신분을 세탁한 뒤 한국식 당구장을 하나 차렸다. 삼촌은 한국으로 오라고 거듭 권했지만,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기 싫었다.

당구장을 운영하면서 그는 갈 데 없는 탈북 청년 수십 명을 그곳에 숨겨주고 먹여주었다.

2006년 미국 워싱턴 의회 건물 앞에서 열린 자유북한주간 행사. 김 대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탈북민들을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다.



● 연변의 치열한 남북 정보전
1990년대 후반 연변은 남북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보위부와 안기부 요원들이 신분을 숨기고 맹활약했다. 이때는 탈북민이 연변에 가장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

탈북민 속에서 북한을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지하조직들도 생겨났다. ‘북한인민해방전선’ ‘피로써 북조선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연합(피민련)’ ‘진달래회’ 등 알려진 것만 5개의 비밀조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폭파시키겠다며 러시아 암시장에서 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RPG)를 사오기도 했다.

보위부는 이 조직들을 적발하기 위해 탈북민으로 위장한 요원들을 계속 잠입시키며 혈안이 돼있었다. 보위부의 공작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1990년대 말 혜산에선 김일성동상을 폭파시키려던 비밀조직 수십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동지들을 밀고한 배신자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보복이 두려워 원산에 이주해 살다가 얼마 뒤 앓아 죽었다.

북한 체제를 겨냥한 수많은 공작을 분쇄시키며 맹활약을 한 지휘관은 함경북도 보위부 윤창주 대좌였다. 북한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수백 명을 납치 살해하며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던 그의 운명은 비참했다. 2011년 처형된 류경 보위부 부부장의 심복으로 낙인돼 함북 보위부 심복 10여명과 함께 처형됐다. 그들의 가족은, 그들이 수없이 사람들을 잡아 보냈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외에도 탈북민 공작에 가담한 북한 보위부 간부와 요원들의 말년은 대개 다 비참했다. 북한에서 사냥개에게 차려진 운명은 토사구팽뿐이었다.

1990년대 후반 연변에서 활약하던 안기부 요원들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적십자 명함을 들고 다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이 시기에 연변에서 성공한 탈북민 출신 사업가로 활동했던 김 씨는 수많은 공작의 전모를 직접 보았다. 하지만 아직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 많기에 나중에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다.

연길에서 많은 탈북민과 연계를 하면서, 그의 신분도 점점 노출되기 시작했다. 언제 체포조가 들이닥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 호적을 갖고 있던 김 씨는 중국 여권을 만들어 한국의 삼촌에게 두 번 놀러오기도 했다. 1999년 2월에도 한국에 와서 강원도 등을 놀려 다니고 돌아가려는데,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공항 직원이 조선족 같지 않은 그의 행동을 심상치 않게 여겨 북한 간첩으로 의심한 것이다. 그는 탈북한 북한 군관 출신이라고 순순히 시인하고 조사기관에 이송됐다.

당시엔 북한군 자주포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때였다. 그는 하나원에도 가지 않고 무려 10개월을 조사받았다. 그리고 1999년 12월 사회에 나와 정착을 시작했다. 2002년엔 중국에서 가족도 데리고 왔다. 한국에서 그는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김성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2005년 워싱턴에서 한성렬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표 면전에서 김정일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들고 시위하는 김성민 대표.



● 대북 라디오의 역사
그가 입국하자 삼촌은 조카에게 자기 회사 부장 직함을 달아주고 사무실까지 내주었다.

하지만 회사에 나가도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출근해 책상 먼지를 털어내고 앉아있는 날이 반복됐다. 그의 성격과 조금도 맞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어울리며 1년 넘게 보냈다. 그러다가 이렇게 탈북민이 많으니 뭉쳐서 뭔가 해보자고 제안했다. 2001년 첫 자생적 탈북단체 ‘백두한라회’가 만들어졌다. 김 씨는 30여명의 회원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다녔는데 매달 두 집씩 독거노인의 집을 찾아 도배를 해주었다.

그렇게 살던 중 2003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게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삼촌 회사를 나와 그는 황 전 비서를 보좌하는 일을 시작했다. 2006년엔 탈북자동지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2004년 그는 첫 민간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만들었다. 2004년 6월 4일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북은 선전 활동을 중지하고 선전 수단을 철거하기로 합의했다는 6·4 합의가 방송에 나오던 날 그는 10여명의 전직 외교관 등 탈북 선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방송을 보던 누군가 “정부에서 대북 방송을 끊으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동석자들의 눈은 일제히 김 씨에게 향했다.

“대북 방송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중에서 김 씨의 나이가 제일 어린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를 방송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 씨는 KBS ‘남북의 창’, KBS 라디오 ‘출발동서남북’ 등에서 MC로 활약했고 국정홍보방송에서 ‘서울말 평양말’ 코너를 3년째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방에 나가 확성기로 북한 지휘관들을 단죄했던 용기도 있었다. 나중에 귀순한 620훈련소 출신 군관은 김 씨에게 그 방송 때문에 620훈련소 정치위원 등이 해임될 뻔 했지만 “변절한 사람의 말을 믿고 해임시키는 것은 억울하다”는 하소연이 인정돼 살아남았다고 했다.

군 총정치국은 그때에야 투서를 보낸 사람의 신원을 밝혔다. 알고 보니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제대했던 선전대 창작조장 출신의 병사가 악감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부대에선 악기를 훔쳐온 비밀을 선전대 간부 몇 명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 제대해 간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선전대장 대리가 돼 가장 큰 수혜자로 여긴 김 씨를 투서자로 확신했던 것이다.

그날 술자리에 참석한 12명이 김 씨에게 대북라디오 방송을 하라며 100만 원씩 모아주었다. 한국의 민간 대북라디오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6·4 합의가 발표된 날에 시작됐다. 하지만 방송인과 라디오 방송 운영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1200만 원으로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기엔 어림도 없었다. 이때 삼촌이 3억 원이란 거액을 건네주었다.

한 북한 관련 연구소의 건물을 빌려 방송국을 차리고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총련 통일선봉대 30여명 등 온갖 단체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매일 같이 시위에 시달리자 김 씨는 없던 오기가 생겨났다.

“내가 대북방송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구나.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

시위대에 시달리던 연구소 측은 나가달라고 했다. 그는 방송국을 서울의 한 작은 빌딩으로 옮겨왔다. 협박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죽은 쥐, 칼을 꽃은 인형 등이 수시로 배달됐다. 팩스에 딸 이름까지 적어 보내며 협박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협박을 견디며 그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해 오고 있다. 그 기간 수없이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

2005년 10월 그는 다른 탈북 여성 3명과 함께 미 하원 탈북자 청문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날 한성렬 유엔대표부 차석대사와 북한 외교관 몇 명이 같은 건물에 왔다. 북한 외교관들이 왔다는 소리에 증언하러왔던 탈북 여성 3명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김 씨는 화가 났다. 급히 종이판을 구해 ‘한성렬,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타도!’라고 적고 한 대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는 것”라고 구호를 외치자 한 대사는 험한 표정으로 “너 이 새끼, 죽을래?”라며 고함을 질렀다. 김 씨는 “너도 죽을거야”라고 맞받았다. 북한 최고의 대미 라인으로 알려진 한성렬은 2018년 진짜로 처형됐다.

김 씨는 북한 주민의 인권과 존엄성 증진을 위해 미국과 한국에서 번갈아 매년 열리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도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미국의 단체들과 연합해 열리긴 하지만, 한국에서 모든 업무를 담당해 처리하는 김 씨가 없다면 이 행사는 열릴 수가 없다.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 공적으로 그는 ‘2009 아시아 민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구글에서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를 검색하면 수많은 기사들이 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북한의 협박도 많아졌다.

2017년 폐암 말기로 사망 선고를 받은 김성민 대표가 오랫동안 옆을 지켜온 부인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 “세 번째 삶을 삽니다.”
2017년 3월 어느 날, 그날도 김 씨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밤늦도록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페이지만 마무리하면 되는데 도무지 자판을 칠 수가 없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작업을 마친 그는 마지막 마침표를 누른 뒤 쓰러졌다.

병원에 가보니 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뇌에 생겨난 시꺼먼 구멍이 보였다.

즉시 수술이 잡혔다. 뇌에 있는 종양을 도려내고 입원해 있는데, 의사가 다시 찾아왔다.

“사진을 판독하니 뇌종양보다 더 심각한 것이 폐암입니다. 암이 폐에서 전이됐어요. 폐암 말기입니다.”

찾아온 가족에게 의사는 “더는 손 쓸 수가 없으니 마지막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 김정은 정권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내가 먼저 죽을 수는 없다. 이젠 살아남는 것이 나의 투쟁이다.”

김 씨는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주사 한 번 맞고 나니 머리가 다 빠졌다. 그의 삶을 아는 지인들이 적극 나서서 수천만 원의 치료비를 모아 후원해주었다. 또 연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암세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치료를 포기하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끝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

기적이 일어났다. 신약 임상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최신 항암제를 투약했다. 임상대상자가 되면 새로 나온 비싼 항암제를 무료로 맞을 수 있다.

이 약의 효과가 너무 좋았다. 폐암 말기에서 치료를 시작한 뒤 5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암 투병 중에도 그는 여전히 자유북한방송 대표로, 북한자유주간의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작년 8월 타자를 치다가 또 같은 증세를 느꼈다.

병원에 가보니 이번엔 반대쪽 뇌에 종양이 생겨났다. 다시 수술을 했는데 예후는 나쁘지 않다. 그는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 미국에서 효과가 뛰어난 항암제가 또 나왔다고 한다.

“사실 삶에 대한 애착은 크게 없어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살았고, 폐암과 뇌암 말기도 이겨냈으니 이미 두 번을 죽었다 살아났다고 봐야죠. 남은 생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살자. 그리고 자유북한방송은 중단돼선 안 된다. 지금 저의 목표는 이 두 가지로 단순하게 좁혀졌어요.”

아버지는 남조선을 해방한다며 평양에서 대남방송을 하다가 숨졌다. 지금은 아들이 서울에서 북한을 해방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 걸고 대북방송을 진행한다. 그는 이미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