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문화부 차장
“토란국에 솔잎떡을 새로 차려(芋羹松餠○初新)/마루 위에서 은근히 모친을 위로하네(堂上慇懃慰母親)/자매와 형제가 한 사람 적다고 탄식하니(姊妹弟兄歎少一)/올해 추석은 가장 마음이 아프네(今年秋夕最傷神)”(‘하재일기·荷齋日記’에서)
궁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했던 중인 출신 지규식은 1900년 추석을 엿새 앞두고 수구(水龜)라는 아홉 살 아이를 병으로 잃었습니다. 명절을 맞아 토란국을 끓이고 송편을 차렸지만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집 뒤엔 대추가 전보다 배나 달려 한가득 따보지만, 주고 싶은 아비의 마음을 아이는 이제 알 수가 없습니다. 지규식은 이런 심정을 시로 지어 일기에 적었습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가족이란 애증이 깊은 관계다 보니 귀성길 정체를 헤치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마주해도 보고팠던 마음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박남수 시인은 읊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바라보는 중추(仲秋)의 달은/그리움의 거울./이북에 계신 할머니를 그리며/미주(美州)에 간 아내를 그리며/내가 지금 귀뚜라미처럼/추운 몸을 떨고 있다”
1933년 10월 추석 즈음엔 돈 벌러 만주로 떠난 오빠를 그리는, ‘고향에서 어린 누이’가 쓴 편지가 게재됐네요. “오늘은 8월 한가위 푸른 하늘에 밝은 달은 말 없이 흐르는 깊은 밤!…머나먼 오빠 계신 그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오라버님의 고생 (생)각할 때 가슴은 바작바작 타오르는 듯 안타까울 뿐입니다.”
삼국사기는 신라 유리왕이 6부(部)를 정한 뒤 패를 갈라 길쌈 승부를 한 데서 가배(한가위)가 유래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는 편이 술과 밥을 내면서 놀았다는 것이지요. 좀 이상한 건 다음 구절입니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탄식하기를,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하여 그 음조가 슬프고 아름다웠으므로 뒷날 노래를 지어 이름을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다.”
졌다 해도, 노는데 왜 슬펐을까요. ‘회소’를 ‘모이소(集)’나 ‘아소(知)’ 등으로 풀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만날 수 없는 영혼들이 모두) 모여 소생(蘇生)하라”는 간절함을 담은 건 아니었을지, 근거 없는 추측을 해 봅니다. “가을이 되었으니/한가위 날이 멀지 않았소/추석이 되면/나는 반드시/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하오”(천상병, ‘한가위 날이 온다’에서)라는 시구처럼 말이지요.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추석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잔소리는 다시 삼키고, 진짜 마음을 전해 봅시다. “보름달이다./…/백수 건달바/아들딸도 보아라,/바람으로 돌아오는/은의환향 밤길엔/그리움의 사연으로도/달은 채워지나니”(김경희, ‘추석’에서)
조종엽 문화부 차장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