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서봉총 북분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 일제강점기 발굴 책임자였던 고이즈미 아키오는 평양에서 서봉총 전시회를 열면서 이 금관을 기생에게 착장시키고 사진을 찍어 파문을 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금관총과 천마총에서 각기 금관과 천마도가 출토되었기에 두 무덤이 그리 불린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서봉총이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하다. 이 무덤은 왜 원래 이름인 노서리(현 노서동) 129호분이 아닌 서봉총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 무덤은 언제쯤 축조된 누구의 무덤일까.
스웨덴 황태자가 지은 이름
고이즈미 아키오와 함께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가 금관을 수습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9월 중순, 봉분을 모두 제거하고 조사원들의 손길이 목관 범위로 접근했다. 금동신발을 필두로 망자의 머리 쪽으로 향하면서 금 허리띠, 여러 재질의 팔찌와 반지, 목걸이, 그리고 금관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소식이 빠르게 일본으로 전해져 이벤트 하나가 기획됐다.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스웨덴 황태자를 발굴 현장에 초청하는 일이었다. 현장 책임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태자가 직접 유물을 수습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목관 내 유물을 수습하지 않고 흰 천과 판자로 덮은 채 귀빈 방문을 기다린 것이다.
10월 10일 오전 10시, 황태자 일행이 현장에 도착하자 조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판자와 천을 제거했다. 청명한 가을볕을 받으며 눈부신 금관이 드디어 공개됐다. 그 장면을 바라본 일행은 모두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황태자는 오전에 금 허리띠를 직접 수습한 데 이어 오후에는 고이즈미와 함께 금관을 들어 올렸다. 고이즈미가 무덤 이름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자 한문에 익숙한 황태자는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에 부착된 봉황 모양 장식에서 ‘봉’자를 뽑아 ‘서봉총’이라고 명명했다.
서봉총 발굴 기록, 남아 있을까
발굴이 끝나갈 무렵 서봉총의 남쪽에 또 하나의 무덤이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발굴 중인 무덤은 서봉총 북분이었던 것이다. 조사를 이어가려 했지만 남분 쪽에 민가가 자리 잡고 있었고 예산 또한 바닥을 보였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철수했다. 북분 발굴 성과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남분 발굴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발굴비가 발목을 잡았다.
고이즈미는 이 발굴을 도약대 삼아 승승장구해 평양박물관장이 됐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서봉총 발굴 기록을 모두 평양으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발굴보고서를 쓸 요량이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않은 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현재 국내에는 서봉총 발굴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그가 평양박물관장으로 재직하던 1935년에는 서봉총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가 끝난 후 파티를 벌이면서 그는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 세트를 평양 기생에게 착장시킨 채 사진을 촬영하도록 했는데, 추후 그 사진이 신문에 공개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고구려 ‘태왕’ 지시로 만든 그릇
서봉총에서는 글귀가 적힌 은합도 출토됐는데, 이 은합은 장수왕 임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져 신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30년대 이후 최근까지 학계에서는 연수라는 연호를 쓴 태왕이 고구려 왕인지 혹은 신라 왕인지 논란을 벌이고 있다. 또한 신묘년은 60년마다 돌아오므로 391년, 451년, 511년이 후보로 거론됐다. 여러 견해 가운데 장수왕 39년(451년)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은합은 1946년 호우총에서 발굴된 415년 고구려산 청동 호우와 더불어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긴밀한 교류 양상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유물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