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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김현수]머스크 같은 ‘광기’도 필요하다

입력 | 2023-10-02 23:48:00

논란에도 비전-신념에 거침없는 美 기업인들
각종 눈치에 말 아끼는 韓, 비전에 목마른 시대



김현수 뉴욕 특파원


지난달 미국 서점가 최대 화제는 단연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전기였다. 아마존에서 예약 구매를 하려고 봤더니 발매 이전부터 이미 베스트셀러였다. X(옛 트위터)에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고 투자설명회나 언론 인터뷰, 각종 포럼에 자주 등장하는 머스크에 대해 우리가 또 모르는 게 있을까?

기우(杞憂)였다. 막장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시청자 항의가 몰릴 것 같다. 특히 배우자에 가까운 여자친구의 대리모 임신 중에 회사 여성 임원에게 정자를 기증했다는 부분은 쇼킹했다. 그런 머스크가 자신의 스타링크(위성 인터넷)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좌우할 만한 힘을 갖게 됐으니 미 정치권이 기겁할 만하다. 미 주류 언론은 저자인 저널리스트 월터 아이작슨이 머스크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며 질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기가 화제인 이유는 광기 어린 한 천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전기차부터 우주선, 뇌신경과학, 인공지능(AI)까지 혁신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인류가 지구 밖 행성에서 문명을 지속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대해서도 곱씹게 만든다.

문득 우리에게도 비전이나 자극을 주는 기업인들이 있나 생각해 봤다. 비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영감이나 현실 진단도 듣기 힘들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미래 산업의 한복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글로벌 기업인들도 많지만 정작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드물다. 매년 신년사도 비슷하다. 내년에도 분명히 ‘전례 없는 불확실성’ ‘위기를 극복하는 기술과 혁신’ 등이 들어가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무슨 기술에 신념이 있는 것인지, 한국 경제 위기의 실체는 무엇인지, 정부의 정책 방향이 맞는지 등에 대한 시각은 알 수 없다. 좀 더 알고자 열심히 취재해도 실명 대신 ‘재계 관계자’로 해달라고 한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만 해도 직접 반도체에 대한 신념을 토로했고,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인터뷰에는 “경제를 관치, 정치, 여론의 족쇄에서 해방해야 한다”는 직언도 쏟아냈다. 하지만 요즘 기업인들은 정부나 시민단체, 여론의 눈치 속에 침묵하거나 누가 들어도 좋은 말만 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잘못 말 했다가 세무조사를 비롯한 각종 역풍을 맞을 수 있다”며 ‘외부 발언에 대한 공포’가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지나치게 높은 도덕적 품격이나 완벽한 언행을 기대하는 점도 많은 이들을 숨게 만든다. 그래서 유명세가 자산인 정치인이나 유튜버 등 목청 큰 사람의 주장만 또렷이 들린다.

미국도 선동형 인물들의 ‘말말말’에 대한 피로감이 적지 않지만 여전히 월가나 실리콘밸리에서 할 말은 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대응을 두고 대놓고 비판했던 일, 이봉 쉬나르 파타고니아 창업자가 환경 문제로 현직이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소송을 건 일도 놀라웠다. 심지어 얼마전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도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미국 진영)가 중국 급소를 쥐고 있다” “내 정체성은 미국인” 등이라고 거침없이 발언했다.

경제가 어려우면 어렵다, 좋으면 좋다는 말도 자칫 정치적으로 해석될까 쉽게 하기 어려운 한국 기업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성의 한복판에서 늘 혜안에 목말라 있다. 광기 어려도 좋으니 눈이 번쩍 뜨일 비전을 듣고 싶다.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